기사 메일전송
[박정윤 소설가의 유리정원] 불탄공장 1회
  • 박정윤 소설가
  • 등록 2025-04-05 00:00:01
  • 수정 2025-04-05 08:09:29

기사수정


1

우리는 보았다. 진회색 승합차에서 내린 청년들이 그를 끌어내렸다. 외국어로 떠들며 주위를 둘러보던 이국 청년들은 그를 젖은 자루처럼 폐유리 더미에 내동댕이쳤다. 유리 파편이 튀어 올랐고 뾰족한 유리 조각이 그의 겨울용 점퍼를 뚫고 파고들었다.

우리는 그를 알고 있다. 유리공장 소년, 서원이었다. 벌판이 지금 벌판이기 전, 숲이었던 시절부터 유리를 칼처럼 휘두르며 뛰어다녔다. 걸을 때마다 삑삑 소리 나는 슬리퍼를 신은 아이는 아랫도리를 벌거벗은 채 걸어 다니다 제 맘이 내키는 곳에 다리를 벌리고 오줌을 눴다. 에비스철강, 테라테크, 투스타스틸, S1엠블럼, 재이화학, 서원산업. 철탑의 편평한 쇠 모서리에 매달려 끝을 뾰족하게 깎은 크레용을 움켜쥐고 공장 이름을 썼다. 더 자라서는 철탑을 향해 배구공을 던졌고 바람 빠진 공을 차며 벌판을 뛰어다녔다. 자전거를 타던 시절에는 휘파람을 불며 철탑 사이를 날렵하게 지나쳤다. 건들거리던 시절도 있었다. 담배 연기를 내뱉다가 불을 끄지 않은 꽁초를 벌판에 휙 내던졌다. 

그리고 지금 그는, 폐유리 더미에 던져져 피를 흘리고 있다. 

우리는 아이였던 그를, 소년과 청년 시절의 그를, 현재의 그를 좋아했다. 잘나서도 아니고 인성이 좋거나 부자여서도 아니었다. 우리가 우리라는 걸 희미하게 인식하게 된 순간부터 우리에게 익숙한 존재였고 그의 모든 것을 여러 겹으로 봐왔다. 

우리는 그의 발목에 매달렸고 셔츠에 붙었고, 침대 헤드레스트에 매달려 순한 표정으로 잠든 얼굴을 보았다.


서원이 기침하며 왈칵 피를 토해냈다. 바람이 철탑을 세차게 후려쳤고 고압 전선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승합차 뒤에 주차한 검은 승용차에서 내린 사내가 서원 앞에 한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사내가 그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목을 뒤로 꺾었다. 

“잘 들어. 애초에 하청은 없었고, 어?” 

그는 의식을 잃은 듯 반응이 없었다. 사내가 그의 뺨을 쳤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사내를 노려보는 서원의 눈에서 붉은 물이 흘렀다. 이국 청년이 그의 몸을 뒤적거려 점퍼 주머니에서 종이봉투를 꺼내 사내에게 줬다. 사내는 서류를 확인한 후 제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이국 청년이 서원의 바지 뒷주머니에서 유리를 뽑았다. 

“메탄올인지 에탄올인지 난 그런 거 모르고.”

“……메탄, 큭.”

서원이 대답하려는데 사내가 머리채를 뒤로 홱 더 꺾었다. 피가 흐르는 코가 닿을 정도로 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일 더 커지기 전에 수습해라, 그 여자, 깨우 얼른 치워.”

사내가 이국 청년의 손에서 낚아챈 유리를 흙바닥에 비볐다. 유리 끝으로 그의 허벅지를 꾹꾹, 누르다 찌를 기세로 그의 목울대에 댔다. 

멈춰, 하지 마, 멈춰. 

우리는 일제히 소리 질렀다. 우리는 경사진 표면에 흐르던 물방울이 닿아 합쳐지듯 서로 스며들고 파고들어 덩어리가 되었다. 미약한 힘을 한데 모아 한 방향으로 밀어붙였다. 고압 전선을 통과한 전파가 파득 빛을 일으키며 벌판의 어떤 전파에 가 닿았다. 우리는 얇은 막처럼 펼쳐져 흙을 뒤덮고 자극했다. 단단하게 얼어붙었던 흙이 바람을 일으켜 사내를 향해, 사내의 눈을 향해 달려들었다. 사내는 유리를 잡은 손으로 흙을 피해 얼굴과 눈을 가렸다. 흙바람이 벌판을 휘저었다. 환영처럼 진눈깨비가 내렸다. 가래침을 뱉은 사내가 유리를 치켜들었을 때, 이국 청년이 그의 팔을 잡았다. 청년이 벌판의 한 지점을 손짓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녹색 컨테이너 문이 벌컥 열렸다.

“핸드폰, 안, 터졌어요. 재이, 잠깐만요.” 

녹색 컨테이너 문을 열어놓은 채 나온 여자는 핸드폰을 귀에 대고 하늘을 쳐다보다 허공에 손을 뻗었다. 깨우, 깨우야. 우리는 그녀 쪽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눈이 오나 봐요. 저는 눈이 보이질 않아요. 네, 진실로요.” 

철탑 사이로 눈이 흩날렸다. 벌판과 컨테이너에 흰 눈이 옥양목을 덮은 듯 편평하게 쌓였다. 사내는 들고 있던 유리를 서원의 허벅지에 던져놓고 몸을 일으켰다. 가죽 장갑으로 제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승용차에 탔다. 이국 청년들도 승합차에 올라탔다. 두 대의 차가 요란하게 지나가자 깨우는 소리가 나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몸에 유리 파편이 박힌 채 피를 흘리고 있는 서원이 옆으로 꼬꾸라졌다. 그 위로 눈이 쌓였다.

뭔가 조치해야 해. 저 여자, 깨우가 도와줄 거야. 맞아, 전파를 교란해 밖으로 끌어냈잖아. 그럼 뭐해, 깨우는 앞이 안 보여. 

우리는 철탑의 쇠 난간을 타고 미끄러졌다. 더미에서 분리되며 각자 말했다. 

깨우는 컨테이너 벽에 기대섰다. 컨테이너는 눈이 닿은 표면에만 흰 눈이 달라붙었다. 깨우가 기대선 곳은 여전히 녹색이었다. 

피가 나. 기절한 것 같아, 어떻게 해봐. 재이, 재이한테 알릴 방법을 찾아, 조용히 좀 해. 

그때, 벌판 끝 공단 고가도로에서 요란한 클랙슨 소리가 울렸다. 육중한 트럭들이 눈발을 뚫고 도로를 짓누르며 달려갔다. 신호를 받은 몇 대의 트럭이 빠르게 지나가자 벌판은 더 고요해졌다. 눈의 입자와 입자 사이, 그 하얀 틈으로 소리가 흡수됐다. 휘이이이, 울리던 철탑의 활선 주위로 적막이 흘렀다. 새들이 흩어지는 눈 사이로 날아가 하얗게 사라졌다. 바람도 숨을 죽였다. 깨우는 귀에 핸드폰을 대고 있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목을 휘감고 있던 청록색 머플러가 길게 풀려 휘날렸다. 서원의 점퍼 주머니에서 기계음이 울렸다. 트럼펫 연주 소리. 트럼펫 소리는 땅에 닿지 못한 눈과 함께 바람에 휩쓸려 허공으로 올랐다. 그녀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방향을 정하고 손을 뻗으며 걸었다. 조용하게 이어지던 트럼펫 소리가 뚝 멈췄다.

깨우가 핸드폰 단축키를 눌렀다. 흩날리는 눈 사이로 장엄한 트럼펫 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깨우는 양팔을 벌려 눈 사이를 더듬어 소리 나는 곳으로 향해갔다. 

29호 철탑 가까이 폐유리가 적재된 곳까지 다가온 깨우는 핸드폰에 대고 말했다. 

“서원 사장님? 거기, 있어요?” 

깨우가 더딘 걸음으로 트렘펫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갔다. 우리는 올이 성긴 여름용 머플러를 잡아당겼다. 길게 늘어진 청록색 머플러 위로 흰 눈이 떨어졌다.


덧붙이는 글

박정윤 소설가는 강원도 강릉 출생이며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에 《강원일보》 신춘문예, 「바다의 벽」으로 당선된 뒤 2005년에 「길은 생선 내장처럼 구불거린다」로 《작가세계》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프린세스 바리』로 제2회 혼불문학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프린세스 바리』, 『목공소녀』, 『연애독본』, 『나혜석 , 운명의 캉캉』, 『꿈해몽사전』 등이있다.

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포토/영상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최신뉴스더보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모과의 귀지를 파내다 모과에 핀 얼룩을 손으로 쓱쓱 문지르니점액질이 끈끈하게 배어 나온다얼굴에 핀 검버섯처럼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반짝거린다 모과의 귀에 면봉을 깊숙이 넣으니갈색의 가루가 묻어 나온다너는 그것이 벌레의 똥이라고 우기고나는 달빛을 밟던 고양이들의 발소리라 하고천둥소리에 놀라 날아들던 새의 날갯짓 소리라 하고새벽바람에 잔..
  2. [새책] 번아웃 겪는 2040세대를 위한 제안 《셀프 콤마》···하루 5분 '일상돌봄 코칭' 끝없는 경쟁과 정보 과잉 속에서 번아웃과 무기력을 호소하는 2040세대가 늘고 있다. '더 애써야만 살아남는다'는 압박감은 우리도 모르는 새에 소중한 자신을 갉아먹는다. 열심히 달려왔는데 왜 마음은 늘 허탈하고 공허한 것일까?새로운제안에서 15년 차 HRD(인적자원개발) 교육전문가 이종미의 첫 책 《셀프 콤마》를 펴냈다. 과부하...
  3. 11월 '코리아세일페스타' 가전 라이벌전···삼성 'AI·상생' vs LG '할인·구독' 정면승부 대한민국 최대 쇼핑 축제 '2025 코리아세일페스타'가 11월 1일 시작되는 가운데, 삼성전자와 LG전자가 10년 연속 행사에 참여하며 대대적인 할인 경쟁에 돌입한다. 삼성전자는 AI 가전 패키지와 소상공인 상생 혜택을 전면에 내세웠고, LG전자는 높은 할인율과 구독 서비스를 무기로 맞불을 놓으며 11월 소비자들의 지갑 공략에 나선다.삼성...
  4.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접히다 "지금 화장 중입니다"승화원 전광판에는 뜨거운 불길이 일고한곳에 모인 우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말이 없었다전광판이 바뀌고눈물이 마르기 전 냉각을 마친 어머니를 모시러 갔다육중한 철문이 열리고철제 침대가 끌려 나왔다붉은 장미로 채운 관과 황금빛 수의는 간 곳 없고주검을 눕힌 그 자리타다만 뼈 몇 개와 재만 놓여 있...
  5. [새책] 20대 청년이 쓴 《마르크스주의 입문》···세계 바꿀 가장 날카로운 무기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되는 지금, 왜 다시 마르크스주의를 읽어야 할까? 1%의 부자가 전 세계 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불평등이 지속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가 계속되면 마르크스주의는 다시 부활할까?오월의봄에서 20대 청년 이찬용이 쓴 《마르크스주의 입문》을 펴냈다. 그동안 나온 마르크스주의 책들은 대부분 오래됐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