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의 한시를 꺼낸 김에 한 주를 더 한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의주로 도망가고 군대는 왜군의 조총 앞에 전멸하다시피 했다. 이 누란의 때에 조국 강산과 백성을 구하기 위해 평소 억압 받고 멸시 받던 평민과 스님 들이 나섰다. 이들에게는 지도자가 필요했다.
김덕령(金德齡, 1567 ~ 1596)은 양녕대군의 장인 김한로(金漢老, 본관은 광산)의 12대손이다. 광주목 석저면 석저성촌(현 성안마을)에서 태어나 '석저장군(石底將軍)'이라 부른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김덕홍과 함께 고경명의 의병에 참여했다. 김덕홍은 '1차 금산전투'에서 전사했다. 이후 김덕령은 3,000여 명을 이끌고 담양에서 활약했다.
1593년 광해군에게 익호장(翼虎將), 권율 장군에게 초승장(超乘將), 이듬해 선조에게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았고 스물여덟에 '8도 의병 총사령관'이 됐다. 그 시기 명과 일본은 화의를 논하고 있었기에 전투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1596년. 왕족 서얼 출신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거짓으로 의병장들이 합류할 것이라고 선전해 많은 군사를 모았지만 관군이 빨리 투입되며 전세는 금세 불리해졌다. 결국 부하들에게 목을 베였다. 그런데 반란군 수뇌들이 "김덕령과 내통했다"고 하는 바람에 반란에 휩쓸렸고, 심문 끝에 옥사한다.
김덕령은 누명을 쓰고 죽은 의병장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이후 뜻있고 용력 있는 사람들은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신원돼 충장(忠壯) 시호를 받았다. 광주의 '충장로'를 그의 시호에서 땄다.(1946년부터 사용)
作詩見志 작시견지
絃歌不是英雄事 현가불시 영웅사
劍舞要湏玉帳遊 검무요수 옥장유
他日洗兵歸去後 타일세병 귀거후
江湖漁釣更何求 강호어조 갱하구
시를 지어 뜻을 보이다
거문고 뜯고 가무를 즐김이 영웅의 일이 아니니
장군 막사에서 칼춤을 추는 게 당당하리
다른 날에 적을 쳐 전쟁 마치고 돌아와
강호에서 낚시질이나 하지 다시 무얼 구하리오
要湏(요수)는 소중한 일 玉帳(옥장)은 장수의 막사를 아름답게 표한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