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무원 사무실에서 나온 할머니는 비닐우산을 나에게 줬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오늘 근무 일이 아니고 미로 마을에 있다고 했다. 철도 관사에 갔다가 미로에 가보자고 말하며 커다란 가방을 들고 앞서는 할머니의 뒤를 따라 대나무 살이 까칠한 비닐우산을 받고 걸었다. 남은 가방을 든 민석은 내가 든 우산 속으로 바짝 다가왔다. 나는 민석과 그 애가 든 생선이 담긴 가방이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싫어 손을 최대한 뻗어 우산을 그 애 쪽으로 씌어줬다. 역사에서 빠져나가자마자 매캐한 연탄 냄새가 났다. 철도 관사는 역에서 가까이 있었다. 뒤로 무연탄 창에서 흘러내리는 탄 속에 파묻힐 것처럼 가까이 있는 야트막한 건물을 보며 대문이 없는 낮은 돌담 장을 돌아 마당으로 들어섰다. 회색 벽에 들러붙은 탄으로 벽은 새카맸다. 일자로 늘어선 파란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관사 마당 붉은 흙 위로 검은 탄 재와 눈이 번갈아 쌓였다. 나무 문 꼭대기에는 1호에서 9호, 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슬레이트를 덧씌운 아래 검은 연탄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 옆에 붉은 꽃이 만개한 나무 한 그루가 마당과 어울리지 않게 서 있었다. 내가 꽃나무를 쳐다보자 할머니가 내 어깨를 밀었다.
“나무 아래 서 있어봐라, 뒤집힌 속이 가라앉을 거다.”
나는 입을 뾰족하게 내밀고 나무 아래에 가 섰다. 민석이 내 옆에 와 섰다. 붉은 꽃잎이 눈송이가 닿았다. 가녀린 눈은 붉은 꽃에 닿자마자 불에 덴 듯 녹았다. 나는 녹색 잎 한 장 없이 나뭇가지에 단독으로 달라붙어 있는 꽃이 신기했다. 꽃잎이 흔들리면서 향이 점점 짙게 번졌다. 붉은 꽃향내가 내 얼굴에 후르륵 떨어져 내렸다.
“이름이 뭐야?”
나는 나무 아래에서 꽃을 쳐다보며 할머니에게 물었다.
“홍매야.”
검은 무연탄 창과 연탄을 배경으로 서 있는, 잊을 수 없는 짙은 향을 떨어뜨리는 붉은 매화나무를 나는 오래 바라보았다. 공원이나 여러 그루 꽃나무 사이에 있었다면 다르게 느꼈을 거였다. 그것은 연약하고 하늘거리고 가냘픈 감성을 자극하는 꽃과는 달리 강렬하고 단단한 감각을 떠오르게 했다. 할머니는 철도 역무원에게 받은 열쇠로 문에 7호, 라고 적힌 나무 문을 열었다. 나는 열린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며 다가갔다. 할머니는 곧바로 나 있는 방문을 열고 커다란 가방을 들여놓고 연탄집게를 기울여 아궁이 쇠뚜껑 사이에 끼우고 뚜껑을 열었다. 하얗게 변한 탄이 보였다. 할머니는 시멘트 부뚜막에 놓여있는 밥솥을 열어보고 나무 찬장을 열었다 닫았다. 밥솥은 새것처럼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조지루시면 뭐하나 밥도 안 해 먹구만. 부뚜막을 올라 문을 열면 곧바로 방이었다. 방 벽에는 보자기로 덮어놓은 철도 제복이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앉은뱅이책상에는 서류와 몇 권의 책, 잉크와 펜과 종이가 각을 맞춰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민석은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발끝을 올리고 맞은편에 나 있는 작은 창을 열었다. 창을 열자 틀에 쌓여 있던 탄가루가 떨어졌다. 창으로는 무연탄 창으로 향하는 검은 수레와 화물칸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민석에서 구석에 있는 검은 걸레로 떨어진 탄가루를 닦으라고 했다. 그 애는 배가 아프다며 할머니에게 변소를 물었다. 할머니가 민석을 데리고 마당으로 데리고 나갔다. 나는 방 안에 놓인 커다란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가방 안에 개켜져 있는 옷을 들춰보았다. 나는 기차 안에서 가방 안을 열어보고 싶은 것을 꼭 참았다. 가방 안에는 민석의 옷만 있었다. 그제야 마음을 놓은 나는 걸레를 들고 떨어진 탄가루를 닦았다. 나는 어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어른들은 상황에 따라 말을 바꿨다. 바빠서, 일이 많아서, 겨를이 없어서. 학교 입학 때는 꼭 발한동 관사로 데리고 가겠다는 엄마는 할머니가 민석이를 제 엄마한테 데려다준다고 했을 때 나를 쳐다보았다. 엄마는 뭔가를 말하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입을 다물었다. 나는 엄마의 행동으로 민석이와 나를 함께 여기로 보내는 것일 거라 짐작했다. 언니들의 이름은 모두 끝에 희, 가 들어간 돌림이었다. 민석과 민아, 그 애와 나는 가운데 돌림을 썼다.
-계속-
박정윤 소설가는 강원도 강릉 출생이며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에 《강원일보》 신춘문예, 「바다의 벽」으로 당선된 뒤 2005년에 「길은 생선 내장처럼 구불거린다」로 《작가세계》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프린세스 바리』로 제2회 혼불문학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프린세스 바리』, 『목공소녀』, 『연애독본』, 『나혜석 , 운명의 캉캉』, 『꿈해몽사전』 등이있다.
[아이즈앨범] 길고 긴 터널의 끝
길고 긴 겨울의 북풍 한설 끝에 봄이, 아주 벅찬 그리하여 완전한 봄이 왔습니다. 너무나 간절하게 간절하게 기다리고 기다리며 애태우던 절망의 그 절망이 사라지고 매화, 그 희망의 봄이 왔습니다.
'아이즈 앨범' 1999년 어느 겨울 새벽
아주 추운 어느 새벽 나의 밤의 미행은 계속되었고 갑자기 친구가 나타났다 외투를 벗어주고 싶었지만 야박하게도 렌즈 노출이 3분을 넘어가고 있었다.파르르 떠는 몸의 파동과 온기를 나눌 연민의 차이처럼 찰라가 만든 결과 뒤 밀려드는 타자들의 고통이 어두웠다. 오늘처럼 쇄골이 시리면 생각나는 그 겨울 그 시간... *2001년 사진전, ...
얼어 붙은 땅에 노란 납매 그리고 동백
꽁꽁 얼어 붙은 날씨였으면 더 신기하고 감격으로 채워졌을 텐데...대한민국이 얼어붙고 혼란스러운 계절납매와 동백이가 핀 1월 따뜻한 봄을 기다려 본다
[아이즈앨범] 첫눈이 말하는 폭설 이야기
큰눈이 내려주었다차는 차대로 엉거주춤사람은 사람대로 조심조심건물들도 내리는 눈에 모서리를 잃어간다모두가 흐려지는 날인데눈 녹은 자리에 다시 큰눈 내리고내리는 만큼 길이 질퍽해져도입가에 번지는 웃음이 있다첫눈이 많이 왔다는 말과 첫눈이 빨리 왔다는 말이 있다오늘 몇 시에 나왔냐는 물음과 퇴근길은 괜찮겠냐는 물음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