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박정윤 소설가의 유리정원] 철암(鐵岩) 4편
  • 박정윤 소설가
  • 등록 2025-11-01 00:00:01

기사수정


나는 아버지의 책상에 앉아 책과 서류 더미와 신문을 들춰보았다. 검은 양장 공책을 넘기자 노란 갱지에 줄을 쳐놓았고 물품구매와 구매 가격 등을 적은 것이 보였다. 줄은 간격이 골랐고 한 줄도 어긋나지 않게 찍어낸 듯 쳐졌다. 공책을 후루룩 넘기다 뒷부분에 끼워진 사진을 보았다. 사진은 흑백 여자 사진이었다. 나는 여자가 민석의 엄마일 것이라 짐작했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간 긴 치마에 반소매 흰 블라우스를 입고 검은 테 안경을 쓴 여자는 손수건으로 구불거리는 긴 머리를 묶고 나무 옆에 서 있었다. 커다란 책을 양손으로 모아들고 서서 웃고 있었다. 웃음은 헤퍼 보이지 않았고 단정했고 조금 드러난 치아는 작고 가지런했다. 검은 나뭇가지에는 옅은 검은 꽃이 피어있었다. 꽃나무를 보자마자 관사 마당에 있는 홍매라는 것을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당황스러웠던 것은 민석의 엄마가 할머니와 엄마가 이웃 여자에게 말했던 것처럼 헤픈 술집 작부 같지 않았다. 내가 그동안 보아왔던 어떤 여자들보다 단정해 보였다. 치마 안으로 집어놓은 블라우스 허리 주름마저 깔끔해 보였다. 나는 바로 위 언니에게 물려받은 빨간 책가방 안에서 국어책을 꺼내 갈피 사이에 사진을 끼워 넣었다. 

발한동 철도 관사에는 묵호역에서 일하는 역무원들과 철도 노동자들이 모여 살았다. 독립적으로 한 채씩 된 사택과 두 집이 붙거나 네 채가 붙어 있는 사택이 있었다. 언덕 위쪽에 있었는데 관사로 들어가는 초입에는 오래된 굵은 물푸레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물푸레나무 아래 평상을 놓고 노인들이 장기판을 벌이기도 했다. 관사로 들어가려면 그곳을 지나쳐야 했기에 관사 마을로 들어서면 모두 그를 알은체를 하거나 낯선 이가 들어서면 호기심을 보였다. 빨간 양산을 쓴 여자가 물푸레나무 아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그날 물푸레나무에 관사 사람들은 얼씬도 하지 않았지만 모두 관사 안에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반나절을 물푸레나무 아래 서 있던 여자가 관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관사 안의 여자들은 담 안에서, 부엌에서, 창 안에서 여자의 움직임을 살폈다. 누구요? 커다란 목청을 가진 엄마가 포도 넝쿨이 뒤덮은 대문을 열었다. 엄마는 양산을 접고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여자의 봉긋 솟아오른 배를 보았다. 엄마의 뱃속에는 내가 웅크리고 있었다. 

할머니는 연탄 아궁이에 불을 붙였다. 연탄가스가 나오니 나에게 나오라고 했다. 할머니는 방 창문과 부엌문 옆의 쪽문을 활짝 열어놓고 나무 문을 걸었다. 마당으로 나오니 어느새 눈은 멈췄고 바닥이 검게 질척거렸다. 모습을 드러낸 해가 빛을 내기도 전에 높고 깊은 산 너머로 떨어지고 있었다. 민석은 연탄집게로 검은 흙을 파내 물이 흐르는 길을 내 검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새로 산 점퍼에 검은 얼룩이 묻었다. 할머니는 손수건에 물을 적셔 점퍼에 묻은 얼룩을 닦아냈다. 

천변 둑길 위로 올라가자 건너편에 여러 채를 이어 붙인 건물이 보였다. 하천 바닥에 목재와 철재를 지지대로 만든 물 위의 빽빽한 건물 여기저기 연소 통에서 검은 연기가 솟구쳤다. 철암역사를 지나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에서도 매캐한 연탄 냄새가 났다. 할머니는 해주옥이라는 간판이 달린 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봤을 때는 허름한 가게였는데 안에는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가득했다. 예닐곱 개 알루미늄 탁자에 푸른 작업복을 입은 남자들이 모여 앉아있었다. 그들 얼굴은 모두 새카맸다. 가운데 뚫린 구멍 안에 들어있는 연탄 위 석쇠에는 고기가 익고 익었다. 부엌 앞 탁자에 서서 고기를 뒤집어주던 여자가 할머니를 보자 아이고 엄니 왔소, 하며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달려와 할머니 손을 잡았다. 할머니는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며 사람이 바글바글하네, 했다. 

“도깨비 눈이 내려 다들 일찍 굴에서 빠져나왔더라구요. 아이고, 야가 가요? 잘 생겼네.” 

여자는 상체를 옆으로 기울이고 민석의 얼굴을 빤히 봤다. 민석은 여자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곁의 연탄불 위 석쇠에서 익고 있는 고기를 노골적으로 쳐다보았다. 할머니가 여자를 주방 쪽으로 끌고 가 얼굴을 바짝 맞대고 속삭거렸다. 막걸리 사발을 내려놓고 고기를 집던 사내가 민석에게 고기 한 점을 집어 참기름에 소금을 뿌려놓은 접시에 담갔다가 입에 넣어주자 민석이 날름 받아먹었다. 민석이 석쇠에 익은 고기를 손짓했다. 

“아이고 고 녀석 맛있나 보구나. 몇 살이야?” 

“일곱 살이요.” 

사내는 민석이 가리킨 고기도 집어 입으로 바람을 불곤 입에 넣어줬다. 민석이 나를 돌아보곤 내 어깨를 잡고 자기 곁으로 당겼다. 다른 사내가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나에게 내밀었다. 뱃속에서 주린 창자가 뒤틀리며 소리를 냈지만 나는 고기 따윈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홱, 돌렸다. 민석이 사내의 손을 잡고 고기를 먹었다. 민석의 행동에 사내들이 제법이라며 한 마디씩 보탰다. 나는 할머니 곁으로 가 섰다. 

“여기 미로 골목이 아니라 삼척 쪽 미로면으로 간 거로구만.” 

-계속-


덧붙이는 글

박정윤 소설가는 강원도 강릉 출생이며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에 《강원일보》 신춘문예, 「바다의 벽」으로 당선된 뒤 2005년에 「길은 생선 내장처럼 구불거린다」로 《작가세계》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프린세스 바리』로 제2회 혼불문학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프린세스 바리』, 『목공소녀』, 『연애독본』, 『나혜석 , 운명의 캉캉』, 『꿈해몽사전』 등이있다.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포토/영상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최신뉴스더보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모과의 귀지를 파내다 모과에 핀 얼룩을 손으로 쓱쓱 문지르니점액질이 끈끈하게 배어 나온다얼굴에 핀 검버섯처럼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반짝거린다 모과의 귀에 면봉을 깊숙이 넣으니갈색의 가루가 묻어 나온다너는 그것이 벌레의 똥이라고 우기고나는 달빛을 밟던 고양이들의 발소리라 하고천둥소리에 놀라 날아들던 새의 날갯짓 소리라 하고새벽바람에 잔..
  2. [새책] 번아웃 겪는 2040세대를 위한 제안 《셀프 콤마》···하루 5분 '일상돌봄 코칭' 끝없는 경쟁과 정보 과잉 속에서 번아웃과 무기력을 호소하는 2040세대가 늘고 있다. '더 애써야만 살아남는다'는 압박감은 우리도 모르는 새에 소중한 자신을 갉아먹는다. 열심히 달려왔는데 왜 마음은 늘 허탈하고 공허한 것일까?새로운제안에서 15년 차 HRD(인적자원개발) 교육전문가 이종미의 첫 책 《셀프 콤마》를 펴냈다. 과부하...
  3. 11월 '코리아세일페스타' 가전 라이벌전···삼성 'AI·상생' vs LG '할인·구독' 정면승부 대한민국 최대 쇼핑 축제 '2025 코리아세일페스타'가 11월 1일 시작되는 가운데, 삼성전자와 LG전자가 10년 연속 행사에 참여하며 대대적인 할인 경쟁에 돌입한다. 삼성전자는 AI 가전 패키지와 소상공인 상생 혜택을 전면에 내세웠고, LG전자는 높은 할인율과 구독 서비스를 무기로 맞불을 놓으며 11월 소비자들의 지갑 공략에 나선다.삼성...
  4.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접히다 "지금 화장 중입니다"승화원 전광판에는 뜨거운 불길이 일고한곳에 모인 우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말이 없었다전광판이 바뀌고눈물이 마르기 전 냉각을 마친 어머니를 모시러 갔다육중한 철문이 열리고철제 침대가 끌려 나왔다붉은 장미로 채운 관과 황금빛 수의는 간 곳 없고주검을 눕힌 그 자리타다만 뼈 몇 개와 재만 놓여 있...
  5. 2025년 포엠피플 신인문학상 주인공 22세 이고은 "시 없인 삶 설명 못 해" 올해 《포엠피플》신인문학상은 22세 이고은 씨가 차지했다. 16일 인천시인협회 주관하고 인천 경운동 산업단지 강당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1,351편의 경쟁작을 뚫고 받은 것이다. 행사 1부는 《포엠피플》 8호 발간(겨울호)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2022년 2월, 문단의 폐쇄적인 구조를 타파하고 회원들과 함께 성장하겠다는 기치 아래 창간된 계..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