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머니는 부엌으로 나갔다. 나는 책가방에서 국어책과 공책을 꺼냈다. 나는 조치원, 의정부, 철암처럼 어려운 글자도 쓸 줄 알았는데 국어 숙제는 우리나라, 대한민국, 어머니, 아버지 등 죄 쉬운 글자를 열 번씩이나 써야 했다. 나는 아버지 책상에 앉아 왼손으로 쓰기 시작했다. 나는 왼손잡이였는데 할아버지와 어른 들 앞에서는 오른손으로 글자를 썼다. 어른들이 없으면 그냥 왼손으로 썼다. 왼손으로 써야 글자가 더 반듯하게 써졌고 빨리 쓸 수 있었다. 민석은 아버지 책상에서 종이와 가위와 풀, 볼펜을 가지고 아랫목에 엎드려 풍선껌과 함꼐 들어있는 명랑 만화책을 펼쳤다. 그 애는 그림을 잘 그렸다. 종이를 오려내 만화책을 보며 그대로 따라 그렸다. 나는 국어책 사이에 끼워놓은 여자 사진을 재빨리 보고 민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동그란 얼굴에 이마가 툭, 불거지고 쌍꺼풀이 진 눈이 커다랬다. 여자와 닮았다. 나는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나가는 문 옆 벽에 걸린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외겹 눈이었다. 할머니가 머리카락을 너무 바짝 잡아당겨 묵어놔서 눈 끝이 째지게 올라갔다. 턱은 뾰족했고 이마는 납작했다. 책상 앞에 앉아 국어책을 펼쳐 사진을 다시 봤다. 민석의 엄마는 지금 이곳에 없다. 할머니의 수양딸이라는 여자가 미로로 발령이 났다고 말했다. 발령은 무슨 말인가. 이사 갔다는 말인가. 아버지도 미로면이란 곳에 가 있다. 그럼 민석은 내일 나와 할머니와 함께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것일까. 나는 민석의 옷으로 가득한 커다란 가방을 쳐다보았다. 암요, 돌려보내야지요. 투기하지 않으려고 혀를 깨물었어요, 아들 욕심에 민아를 밀쳐내고 제 젖 먹여 키웠어요. 그런데 감쪽같이 속이다니. 엄마는 민석을 제 엄마에게 데려다주고 올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을 터였다.
할머니는 양은밥상에 밥과 생선구이, 두부조림을 차려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밥상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연탄불에 구운 생선은 몸통이 시커멓게 탔고 하얗게 변한 눈알이 눈구멍에서 쑤욱 빠져나와 있었다. 할머니가 젓가락으로 옆구리를 헤치자 젖은 내장이 흘러나왔다.
“다른 반찬 없어?”
“숟갈을 오른손으로 잡아라. 이거 한 번만 먹어봐.”
할머니는 왼손으로 생선 머리를 잡고 오른손에 쥔 젓가락으로 생선 살을 발라서 내 밥 위에 놨다. 나는 기겁하고 생선을 밀치고 맨밥을 먹었다. 나보란 듯이 민석은 할머니가 발라준 생선을 먹고 소금간만 해 군두부를 숟가락으로 떠먹었다. 나는 흐물흐물하는 두부 질감이 싫었다.
“수양딸 아줌마가 고기 줬잖아.”
“그건 아비 오면 보이고 먹어야지.”
“우리 내일 집으로 가는 거 아냐? 민석인 제 엄마한테 데려다주고.”
할머니는 젓가락질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할머니의 흐릿한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나는 민석을 힐긋 보았다. 민석은 입안에 들어간 가시를 빼내느라 손을 입에 넣고 입속을 휘젓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 옆으로 밀쳐두었던 생선 살과 밥을 크게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었다. 입에 넣은 순간 고소한 맛이 났다. 쿰쿰한 비린내를 풍기던 생선 살에서 이렇게 고소한 맛이 날 줄을 몰랐던 나는 깜짝 놀랐다. 할머니는 말없이 생선 살을 발라서 내 밥그릇에 두었다. 나는 놓기가 무섭게 먹었다. 생선 껍질이 살짝 달라붙어 있었는데 껍질 부분이 더 고소했다. 생선에 달라붙어 있던 비늘은 없었다.
“거봐, 맛있지?”
내가 할머니가 주는 쪽쪽 잘 받아먹자 할머니는 그제야 마음이 풀어졌는지 할머니 몫으로 밀쳐두었던 생선마저 헤쳐 살을 내 숟가락에 올려주었다. 나는 밥 한 공기를 생선 살로 뚝딱 해치웠다. 할머니가 양은 밥상을 들고 부엌으로 나갈 때 나도 따라 나갔다.
“눴나?”
“아니, 더럽고 냄새나 토할 것 같아.”
“안 나오면 내일 누던가.”
변소는 벽이고 바닥이고 온통 새카매서 어디가 구멍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냄새는 너무 심해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발한동 관사는 대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 현관에 들어서서 왼편에 왜식 화장실이 있었다. 밑바닥이 깊어서 똥이 보이지도 않았다. 엄마와 언니들이 수시로 물 칠을 하고 바닥을 씻었다. 그곳에선 늘 나프탈렌 냄새가 났다. 할아버지 집 변소는 텃밭 끝에 있는 구식변소였지만 할아버지 몰래 텃밭에서 볼일을 봤다. 나는 최대한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는 습관이 생겨 늘 변비에 시달렸고 된똥을 눴다. 왼손으로 코를 잡고 엉덩이를 들었다. 빨간 코트 옷자락이 바닥에 닿을까 걱정되어 오른손으로 코트 자락을 말아 움켜쥐었다. 자세가 나빠 더 안 나오는 것 같았다. 할머니가 밖으로 나오라 해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밖으로 나왔다. 할머니는 붉은 매화나무 아래 신문지를 깔아놓고 손짓했다. 나는 나무 아래로 가 신문지를 양발로 고정하고 앉았다. 머리 위로 매화향이 떨어졌다.
“할머니.”
할머니는 불이 켜지지 않은 관사 나무문을 하나씩 잡아당겨 보았다.
“발령이 뭐야? 이사 가는 거야?”
“거, 비슷하지, 왜?”
“민석이 내일 우리랑 같이 갔다가 다음에 데려다주자.”
“아이고 불여우 어른들 일에 참견 좀 하지 마라.”
-계속-
박정윤 소설가는 강원도 강릉 출생이며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에 《강원일보》 신춘문예, 「바다의 벽」으로 당선된 뒤 2005년에 「길은 생선 내장처럼 구불거린다」로 《작가세계》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프린세스 바리』로 제2회 혼불문학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프린세스 바리』, 『목공소녀』, 『연애독본』, 『나혜석 , 운명의 캉캉』, 『꿈해몽사전』 등이있다.
[아이즈앨범] 길고 긴 터널의 끝
길고 긴 겨울의 북풍 한설 끝에 봄이, 아주 벅찬 그리하여 완전한 봄이 왔습니다. 너무나 간절하게 간절하게 기다리고 기다리며 애태우던 절망의 그 절망이 사라지고 매화, 그 희망의 봄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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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추운 어느 새벽 나의 밤의 미행은 계속되었고 갑자기 친구가 나타났다 외투를 벗어주고 싶었지만 야박하게도 렌즈 노출이 3분을 넘어가고 있었다.파르르 떠는 몸의 파동과 온기를 나눌 연민의 차이처럼 찰라가 만든 결과 뒤 밀려드는 타자들의 고통이 어두웠다. 오늘처럼 쇄골이 시리면 생각나는 그 겨울 그 시간... *2001년 사진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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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꽁 얼어 붙은 날씨였으면 더 신기하고 감격으로 채워졌을 텐데...대한민국이 얼어붙고 혼란스러운 계절납매와 동백이가 핀 1월 따뜻한 봄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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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눈이 내려주었다차는 차대로 엉거주춤사람은 사람대로 조심조심건물들도 내리는 눈에 모서리를 잃어간다모두가 흐려지는 날인데눈 녹은 자리에 다시 큰눈 내리고내리는 만큼 길이 질퍽해져도입가에 번지는 웃음이 있다첫눈이 많이 왔다는 말과 첫눈이 빨리 왔다는 말이 있다오늘 몇 시에 나왔냐는 물음과 퇴근길은 괜찮겠냐는 물음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