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에서 깼을 때, 누군가 내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실눈을 뜨고 민석의 얼굴을 살폈다. 내 쪽을 향해 얼굴을 내밀고 입을 벌리고 잠든 민석의 입에서 숨소리가 들렸다. 내 곁에 쩍 들러붙어 다닐 때는 귀찮았고 싫었지만 자는 모습은 귀여워 보였다. 민석이 엄마 찾아 울며 떼를 쓰면 가끔 방학 때, 할머니가 민석의 엄마에게 데려다주었다. 그러나 매번 방학이 끝나기 전에 돌아왔다. 언니들 방학에 맞췄다고 생각했는데 민석의 엄마 시간에 맞춘 거였다. 민석의 엄마가 이곳 미로보다 더 깊숙한 미로로 발령이 났다고 했다. 어쩌면 민석은 우리와 함께 다시 할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 할지 몰랐다. 열린 방문 틈으로 찬바람과 함께 간장 졸이는 냄새가 났다. 마당에서 할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다들 밤에 들어 왔구만. 아침은 먹었소? 대놓고 먹는 식당 있어요. 간장 졸이는 냄새 속에서 탄내가 났다. 나는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고 밖으로 향해 소리쳤다.
“할머니 탄내나.”
할머니는 허둥지둥 부엌으로 들어와 치마를 걷어 양은 냄비를 꺼냈다. 할머니는 밤새 연탄불 위에 찜통을 올려놔 물을 끓였다. 끓인 물에 찬물을 섞어 우리에게 번갈아 씻으라고 했다. 할머니는 밑이 검게 탄 감자조림을 한입 깨물고 우리에게 줬다. 할머니 잇자국이 난 감자에 비위가 상한 나는 맨밥만 먹었다.
할머니는 철암 역으로 가며 나에게 당부했던 것을 다시 상기시켰다.
“묵호부터 기차역 순서 말해봐. 어차피 종점이니까 다들 내릴 거야. 미아네 가서 할머니 안 왔다고 저녁 차려달라고 해. 가방 안에 넣어 둔 고기 미아할머니한테 꺼내주고. 할아버지 저녁 약 쓰다고 안 잡수시면 밤에 잠을 못 주무시니깐 꼭 곁에서 삼키는 거 확인하고 사탕 까드리고.”
“할머닌 왜 같이 안 가냐고.”
“일이 있다니깐.”
“민석이 다음에 보내고 다 같이 가자니깐. 쟤 엄마 미로로 발령 났다며? 어차피 개학이니 학교 선생님이면 바쁠 거잖아.”
“아이고 불여우, 할미 속을 돋구네. 말대꾸 좀 그만하고 똑바로 알아들었어?”
할머니는 개찰구 직원에게 인사하고 플랫폼까지 따라 들어왔다. 내가 기차에 올라탈 때 민석이 내 빨간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기차에 올라타자 강릉에서 출발할 때와 달리 빈자리가 별로 없었다. 빈자리는 창가 쪽이 아닌 통로 쪽이고 대부분 아저씨와 할아버지들 옆자리가 비었다. 나는 서서 갈 생각으로 통로 쪽 손잡이에 기대섰다. 갑자기 할머니가 기차로 올라와 어떤 할아버지에게 얘가 비위가 약해 멀미가 심하니 창가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했다. 할아버지가 모자를 위로 들어 올려 나를 보고는 자리를 옆으로 옮겨주었다. 할머니는 나를 창가 자리에 앉히고 급하게 기차에서 내렸다. 할머니가 내리자마자 기차가 출발했다. 기차가 지그재그로 내려갈 때부터 나는 신물이 넘어오는 것을 누르고 누르며 참다가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풍선껌, 청포도 맛 사탕 그리고 만화책이 있었다. 만화책은 민석이 직접 그린 거였다. 풍선껌과 같이 들어있는 만화를 그대로 베낀 것이 아니라 못대로 그렸다. 나는 조악한 작은 만화책을 보다 속이 울렁거려 차가운 창에 이마를 기댔다. 찬 기운이 닿자 메슥거리던 속이 진정되었다. 망상을 지나 바다가 창 가득 밀려들 때 만화책을 펼쳤다.
2012년 6월 26일 화요일, 오후 4시. 강릉을 출발해 청량리로 향하는 무궁화호 1604호 열차가 나한정역에 도착했을 때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국내 유일의 스위치백 구간입니다. 기차가 거꾸로 운행하게 됩니다. 스위치백은 오늘을 마지막으로 추억 속으로 사라집니다.”
나는 지그재그로 움직이는 기차 속에 앉아 진녹색으로 짙어지는 깊은 산을 보았다. 스위치백 구간을 마지막으로 운행한다는 안내 방송이 끝나자 승객들 대부분은 도계역에서 내렸다. 사람들은 방금 철도 역사의 현장으로 사라진 곳을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었다. 나는 철암역에서 내렸다. 역사 건너편 천변 위 까치발 건물들은 오래전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이 빈 건물이었다. 나는 철암역에서 내려 천변을 향해 걸었다. 민석이 그린 만화의 내용은 단순했다. 미나, 소원이 뭐야? 예뻐지고 싶어? 네, 공주가 되고 싶어요. 그럼 예뻐져라, 얍. 로봇 마법사인 민석이 내 소원을 들어주는 거였다. 그 후 많은 시간이 지났다. 나는 마흔 살이 넘었고 민석도 그럴 거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소식을 들은 적도 없었고 우연히 마주친 적도 없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던 거였다. 봄인데도 눈이 내리던 날, 우리는 할머니와 함께 철암역에서 내렸다. 내리자마자 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거대한 기차 바퀴 옆에 쪼그리고 앉아 토했다. 그리고 곁에 그 애가 서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무연탄가루가 떠다녀 새카맸다.
-끝-
박정윤 소설가는 강원도 강릉 출생이며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에 《강원일보》 신춘문예, 「바다의 벽」으로 당선된 뒤 2005년에 「길은 생선 내장처럼 구불거린다」로 《작가세계》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프린세스 바리』로 제2회 혼불문학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프린세스 바리』, 『목공소녀』, 『연애독본』, 『나혜석 , 운명의 캉캉』, 『꿈해몽사전』 등이있다.
[아이즈앨범] 길고 긴 터널의 끝
길고 긴 겨울의 북풍 한설 끝에 봄이, 아주 벅찬 그리하여 완전한 봄이 왔습니다. 너무나 간절하게 간절하게 기다리고 기다리며 애태우던 절망의 그 절망이 사라지고 매화, 그 희망의 봄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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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추운 어느 새벽 나의 밤의 미행은 계속되었고 갑자기 친구가 나타났다 외투를 벗어주고 싶었지만 야박하게도 렌즈 노출이 3분을 넘어가고 있었다.파르르 떠는 몸의 파동과 온기를 나눌 연민의 차이처럼 찰라가 만든 결과 뒤 밀려드는 타자들의 고통이 어두웠다. 오늘처럼 쇄골이 시리면 생각나는 그 겨울 그 시간... *2001년 사진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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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꽁 얼어 붙은 날씨였으면 더 신기하고 감격으로 채워졌을 텐데...대한민국이 얼어붙고 혼란스러운 계절납매와 동백이가 핀 1월 따뜻한 봄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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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눈이 내려주었다차는 차대로 엉거주춤사람은 사람대로 조심조심건물들도 내리는 눈에 모서리를 잃어간다모두가 흐려지는 날인데눈 녹은 자리에 다시 큰눈 내리고내리는 만큼 길이 질퍽해져도입가에 번지는 웃음이 있다첫눈이 많이 왔다는 말과 첫눈이 빨리 왔다는 말이 있다오늘 몇 시에 나왔냐는 물음과 퇴근길은 괜찮겠냐는 물음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