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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윤 소설가의 유리정원] '비의 음률' 1회
  • 박정윤 소설가
  • 등록 2025-01-11 00:00:01
  • 수정 2025-02-04 21: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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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모퉁이를 돌았을 때 여자가 있었다. 흘러내리는 몸을 구부린 무릎에 겨우 추스르고 책 기둥에 등을 기댄 채 바로 앞의 책을 바라보고 있었다. 낡은 책의 갈피보다 더 나달나달한 표정이었다. 여자의 몸과 영혼은 훼손되었다. 점액질이 흐르는 아가미를 칼로 들춰낸 생선처럼 날 것의 슬픔이 달싹거렸다. 파헤쳐놓은 축축한 생선 내장처럼 후륵 쏟아지는 그녀의 슬픔을 나는 건드릴 수 없었다.


알루미늄 셔터를 올리자마자 나는 출입문이 열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셔터를 들어 올리는 팔의 힘이 빠졌다. 문을 열고 천장까지 빼곡하게 쌓인 책 기둥을 모두 돌아보았다. 뾰족한 철탑, 고성, 지중해, 바람의 결이 그려진 모래사막, 시퍼런 바다를 바라보는 방파제 위에 앉은 뒷모습의 연인들 사진들이 있는 책 기둥을 돌았다. 만년 고시생의 밤이 고스란히 쌓여 있는 민법, 형법강의, 법학통론, 법학입문 책이 쌓인 더미를 지나 다락으로 가는 나무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의 중턱에 올라섰을 때 정면 벽에 걸린 거울에 고집스러운 남자의 모습이 비췄다. 앞머리가 빠져 휑한 이마와 정수리 옆에 착 달라붙은 곱슬머리는 염색하지 않아 하얬다. 늙고 힘없는 흰 염소 같았다. 타원형 거울의 나무 테두리에는 양각으로 새겨진 꽃과 잎줄기에 금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거울은 아버지가 양키 시장에서 사 온 거였다. 조계지에 있던 독일인의 집을 처분할 때 큰 가구는 제물포 구락부로 옮기고 남은 자잘한 물건 틈에 끼어 양키 시장을 떠돌던 것을 아버지가 발견했다. 아버지는 거울이 백 년 전 유럽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거울 뒷면에는 1905라는 숫자와 함께 누군가의 서명으로 추정할 수 있는 고딕체 글씨가 써져있었다. 거울을 제작한 사람일 수도 있었고 거울의 첫 소유자 서명일 수도 있었다. 거울 표면은 오랜 세월동안 닦여 얇아진 것도 같았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거울 앞에 서서 이 거울을 바라보았을 수많은 사람들을 상상하는 시간을 즐겼다. 가슴을 반 넘게 드러낸 레이스 드레스를 입은 여인, 흰 면사포를 뒤집어 쓴 신부, 콧수염을 매만지는 푸른 제복을 입은 군인, 혹은 아사 면으로 거울을 닦기 위해 입김을 불어 넣는 흰 에이프런을 두른 하녀. 거울은 수많은 사람의 모습을 비춰 무수히 많은 혼이 깃들었을 것 같았다. 거울 앞에 서면 나는 중세의 기사가 되었다가 신부의 면사포를 걷어내는 장군이 되기도 했다. 불을 끄면 거울 표면은 검게 번들거렸다. 그 순간, 희미하게 얼룩처럼 누군가의 얼굴이 비춰졌다. 얼굴은 내 모습을 보는 것처럼 나와 흡사한 얼굴이었다. 거울 속의 얼굴과 거울 밖에 서 있는 나의 엇갈린 운명의 비밀을 거울은 알고 있는 듯했다. 여자는 다락으로 올라가다 거울 앞에서 주저앉아 울었다. 그날 아침에도 거울 앞에 매달려서 빨간 립스틱을 발랐어요.

야트막한 다락의 책더미 사이 사각형 창틈에서 틀어오는 햇살 사이로 부유하는 책 먼지가 떠다녔다. 나는 햇살 사이로 손을 뻗었다. 잡을 수 없는 환각처럼 슬픔이 몰려들었다. 좁고 어두운 동굴 같은 다락의 공간을 천천히 살펴본 후 계단을 내려왔다. 책 기둥에 기대 무릎을 구부리고 앉았다. 어떤 빛으로도 바람으로도 마르게 할 수 없는 여자의 슬픔을 떠올렸다. 어떤 사람에게는 퍼내고 퍼내도 슬픔이 철철 넘쳤다. 슬픔을 잊으려면 얼마만큼 시간이 흘러야할까요. 살아있는 동안 그 기억을 끝낼 수 있을까요. 시간이 갈수록 더욱 쌓이는 슬픔을 끝내려면 결국 죽음밖에 없는 것인가요. 나는 여자의 혼잣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다만 나는 여자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여자의 평온을 기원하며 낡고 오래된 서점에서 하루를 시작했다. 오후가 되어 낡은 책 꾸러미를 들고 오는 첫 손님이 올 때까지 앉아 있었다. 어쩌다 지나가는 소나기처럼 이리로 들어올지도 모르는 여자를 나는 기다렸다.


-다음주에 2회가 이어집니다. 


박정윤 소설가는 강원도 강릉 출생이며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에 《강원일보》 신춘문예, 「바다의 벽」으로  당선된 뒤 

2005년에 「길은 생선 내장처럼 구불거린다」로 《작가세계》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프린세스 바리』로 제2회 혼불문학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프린세스 바리』, 『목공소녀』, 『연애독본』, 『나혜석 , 운명의 캉캉』, 『꿈해몽사전』 등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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