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헌, 이라는 관형사는 오래되어 성하지 아니하고 낡은 것을 뜻했다. 사전적 의미였지만 나는 정확한 뜻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헌 것이라고 모두 성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책에 관해서는. 같은 책이 단지 낡고 헌 것이 되었다고 그 안에 품고 있는 내용이 낡거나 성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겉과 표면이 낡았지만 취하는 사람에 따라 그것을 품고 있는 속은 더욱 빛날 수도 있었다. 잘 닦아 길을 들여놓은 거울처럼. 나는 기억나지 않은 오래전부터 새 제품이라는 말 못지않게 헌책방이라는 말이 싫었다. 어렸을 때 이 골목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책방이 있었다. 책방 사이사이에 문구용품 대리점이 있었다. 그곳에는 공장 기계에서 방금 빠져나온 새 제품의 문구용품이 있었다. 나는 빠닥빠닥 거리는 플라스틱 새 제품의 촉감보단 낡고 오래된 책갈피를 넘기는 감촉이 좋았다. 눅눅한 것은 눅눅해서 좋았고 바싹 마른 종이는 바싹거려서 좋았다. 나는 아버지가 어디선가 가져다준 낚시용 비닐 의자를 책더미 사이로 옮기며 앉아 책을 꺼내 읽었다. 언제 어떻게 한글을 깨우치고 책을 읽기 시작했는지 기억도 나기 전부터 늘 책더미 속에 있었다. 그들도 책 더미 속에 파묻혀 있던 어느 날 찾아왔다.
그들의 방문은 그전에도 있었을지 몰랐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열세 살 때였다. 당시 나는 전기문에 빠졌다. 사람의 생몰년 대를 계산하며 인생 행로를 따라가면 나 또한 여러 인생을 살아가는 경험을 했다. 어떤 위대한 사람, 아름답거나 극빈한 사람, 고통을 겪는 사람도 결국 한 세기를 다 못 살고 죽었다. 모든 책의 끝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다. 어린이용 전기문을 모두 섭렵했을 때는 성인용 책을 꺼내 날개에 있는 저자의 생몰년 대와 간단한 약력을 읽었다. 몇 줄로 요약되는 저자의 생을 알고 두꺼운 책 제목을 보면 비밀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신비한 문 앞에 서 있는 기분이 들곤 했다. 어떤 책은 책 뒷부분에 저자의 약력을 좀 더 길게 적어 놓은 것도 있었다. 나는 책의 저자들 생몰년 대를 헤아리다가 점점 강력한 죽음에 끌렸다. 젊은 나이에 요절하거나 권총 자살, 몸에 돌을 매달고 강으로 들어간 여자, 행려병자로 길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여류화가, 매독과 정신병에 걸려 죽은 사람, 할복자살한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1899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1986년 4월 26일 일본계 아르헨티나인 여비서 마리아 고따마와 결혼했다. 스위스 제네바로 이주한 그는 결혼한 지 50일 만에 죽었다. 책 표지는 검은 바탕에 심플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검은 선과 빨간 원, 아이의 손 글씨로 쓴 것 같은 책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전집이었지만 책방에 들어와 있는 책은 『셰익스피어의 기억』과 『불한당들의 세계사』 두 권이었다. 죽을 것을 알면서 결혼을 한, 실명으로 한쪽 눈을 깜박이는 것처럼 보이는 노작가의 사진을 보고 있을 때 책방으로 부인 두 명이 들어왔다. 대체로 책방을 찾는 이들은 판매를 목적으로 한 책을 가지고 온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말없이 서가를 둘러보는데 그들은 책방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호명하며 아버지를 찾았다. 간이 사다리 위에 있던 아버지가 황급히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아버지는 나를 그녀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키가 훌쩍 컸군요.”
“네, 책을 아주 좋아한답니다.”
그녀들은 카운터 앞에 서서 아버지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나를 계속 바라보았다. 나는 책을 읽는 척했지만, 신경이 온통 그들에게 가 있었다.
“애 엄마가 먼저 가고 난 후 그 제안에 고민을 많이 했지만.”
“그럼요, 힘든 시기셨어요. 저희는 선생님의 결정을 존중해요. 그렇지만 이번에는.”
아주 잠깐 모두 침묵했다. 내가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을 때 그들이 나를 노골적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 모르는 것 같군요.”
“네, 조만간.”
그들이 책방에 머문 것은 십 분 정도였다. 아버지는 그녀들 앞에서 벌 받는 아이처럼 두 손을 모았다가 머리를 긁적였고 커피를 대접하려 했지만, 그들이 말렸다. 그들을 골목 끝까지 배웅하고 돌아온 아버지가 출입문을 닫아걸고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엉덩이를 들어 바지 뒷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독한 담배 연기가 바싹 마른 책 사이로 스며들었다. 낡은 책더미 사이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아버지의 모습은 언제 봐도 멋져 보였다.
“기억나? 오래전에 니 비행기 탔었는데.”
-다음주에 4회가 이어집니다.
박정윤 소설가는 강원도 강릉 출생이며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에 《강원일보》 신춘문예, 「바다의 벽」으로 당선된 뒤
2005년에 「길은 생선 내장처럼 구불거린다」로 《작가세계》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프린세스 바리』로 제2회 혼불문학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프린세스 바리』, 『목공소녀』, 『연애독본』, 『나혜석 , 운명의 캉캉』, 『꿈해몽사전』 등이있다.
[아이즈앨범] 길고 긴 터널의 끝
길고 긴 겨울의 북풍 한설 끝에 봄이, 아주 벅찬 그리하여 완전한 봄이 왔습니다. 너무나 간절하게 간절하게 기다리고 기다리며 애태우던 절망의 그 절망이 사라지고 매화, 그 희망의 봄이 왔습니다.
'아이즈 앨범' 1999년 어느 겨울 새벽
아주 추운 어느 새벽 나의 밤의 미행은 계속되었고 갑자기 친구가 나타났다 외투를 벗어주고 싶었지만 야박하게도 렌즈 노출이 3분을 넘어가고 있었다.파르르 떠는 몸의 파동과 온기를 나눌 연민의 차이처럼 찰라가 만든 결과 뒤 밀려드는 타자들의 고통이 어두웠다. 오늘처럼 쇄골이 시리면 생각나는 그 겨울 그 시간... *2001년 사진전, ...
얼어 붙은 땅에 노란 납매 그리고 동백
꽁꽁 얼어 붙은 날씨였으면 더 신기하고 감격으로 채워졌을 텐데...대한민국이 얼어붙고 혼란스러운 계절납매와 동백이가 핀 1월 따뜻한 봄을 기다려 본다
[아이즈앨범] 첫눈이 말하는 폭설 이야기
큰눈이 내려주었다차는 차대로 엉거주춤사람은 사람대로 조심조심건물들도 내리는 눈에 모서리를 잃어간다모두가 흐려지는 날인데눈 녹은 자리에 다시 큰눈 내리고내리는 만큼 길이 질퍽해져도입가에 번지는 웃음이 있다첫눈이 많이 왔다는 말과 첫눈이 빨리 왔다는 말이 있다오늘 몇 시에 나왔냐는 물음과 퇴근길은 괜찮겠냐는 물음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