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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눈썹
  • 어향숙 시인
  • 등록 2025-02-16 00:00:01
  • 수정 2025-03-30 11:5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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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한동안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쓰고 다녔다


빛이 잘 안 드는 날에도

이마까지 수건으로 

꽁꽁 싸매었다 

 

봄날 아침

일찍 수색에 나가 

목욕도 오래 하고


화교 주방장이 

새로 왔다는 반점(飯店)에서 

우동을 한그릇 먹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우연히 들른 미용실에서

눈썹 문신을 한것이 탈이었다


아버지는 그날 저녁

엄마가 이마에 지리산을 그리고 왔다며 

밥상을 엎으셨다 

 

어린 누나와 내가 

노루처럼

방방 뛰어 다녔다 


-박준 시인의 시 '눈썹' 전문



이 시는 박준 시인의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에 실려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도 답답하고 눈썹 그리는 것도 마음에 안들어 친구 따라 눈썹 문신이나 할까,하고 생각하다가 이 시가 생각나 혼자 웃었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 했던가.

화자의 엄마도 지루한 겨울을 보낸 어느 봄날, 시내에 나갔다가 목욕도 하고 좋아하는 우동도 한 그릇 먹으며 소박한 일탈을 즐겼을 게다. 그리고 우연히 들른 동네 미용실에서 계획에 없던 눈썹 문신까지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저녁 아버지가 밖에서 안좋은 일이 있었는지, 산처럼 그린 눈썹이 마음에 안드셨는지 밥상을 엎으셨다. "이마에 지리산을 그리고 왔다" 라는 표현이 참 재밌다. 덕분에 시의 경계는 넓어지고 상상력도 풍성해진다. 그래서 뒤에 "노루"도 자연스레 읽힌다.


언젠가 소심한 필자의 아버지도 엄마에게 말로 이길 수 없는지 딱 한 번 밥상을 엎어 불만을 표시한 적 있다. 그때 어린 나와 언니도 놀라 울면서 "노루" 처럼 방방 뛰었던 기억이 있어 이 시가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 시절을 보낸 서민들의 소소한 이야기가 우리를 시간여행하여 웃게 하고 또 현재를 견디며 살아가게 한다. 참 마음이 따스해지는 시다.


덧붙이는 글

어향숙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김유정 신인문학상'(2016)을 받았다. 시집으로 《낯선 위로가 눈물을 닦아주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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