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투루 들었다.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흘려들었다. 삼짇날 흰나비 보면 상복 입고 호랑나비, 노랑나비 보면 웃을 일 생긴다. 외할머니는 장독대에서 독을 닦다 치맛자락에 앉은 흰나비를 쫓으며 말했다. 벌써 나비가 있네요, 사월인데. 날이 덥긴 덥네요. 내 키만 한 독에 붉은 고추장을 퍼 담은 외숙모는 붉은 물로 더럽혀진 앞치마를 벗고 새 앞치마를 둘렀다. 구름에 헹군 것처럼 희고 빳빳했다. 누가 본다고. 외할머니는 앞치마 허리끈을 묶고 있는 외숙모를 못마땅한 듯 쳐다봤다. 누가 봐야 하나요? 제 천성이 그런걸. 고와, 고와서 그러지, 더 늦기 전에 내 니를 쫓아내야 할 텐데. 가라, 가. 할머니는 툭하면 외숙모를 쫓아낸다고 말했다. 할머니의 지르는 목청에 내 손을 피해 장독을 타 넘던 흰나비가 바람 속으로 달아났다. 나는 조청 묻은 손으로 두 눈을 가렸다. 그럼, 흰나비 봤을 때 얼른 눈 가리고, 민들레 번지는 들판으로 호랑나비 노랑나비 찾으러 가야 하나. 나는 나비 흉내를 내며 할머니 앞에서 팔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뱀 밟지 마라.” 할머니가 물앵두나무 그늘진 우물가에서 고춧물 든 붉은 손을 씻으며 하는 말을 허투루 들었다. 그래서 뱀을 밟았다, 뒤란 장독대에 핀 진달래를 꺾다가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뱀은 기지개를 켜듯 녹색 몸을 일자로 늘렸다. 홀쭉하고 가느다랬다, 파처럼. 무심결에 밟았다. 꾹. 물컹하면서도 단단한 야릇한 감촉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어어, 할머니. 나 뱀 밟았어." 꿈틀거리던 녹색 뱀은 흙을 누르며 꽃나무 그늘로 사라졌다. 할머니는 내 발목을 잡고 이리저리 돌리며 살폈다. "그르게 새겨듣지 그랬어." " "할머니 뱀을 밟으면 어떻게 되나? 어?" 할머니는 대답 없이 손 주먹으로 허리를 두들기며 먼 하늘에 몰려 있는 구름의 위치를 가늠했다.
외할머니는 장독의 낡은 덮개를 죄 벗겼다. 독에 빠질 듯 허리를 숙이고 독 안에서 하얗게 굳은 소금을 걷어내고 검은 액체를 국자로 펐다. 니 시할머니 되는 양반이 지은 간장이다. 요건 재작년 니랑 같이 해 담은 더덕장아찌네, 이거 빨리 먹어 치워야 하는데. 이게 니 서방 군에 가던 해 담근 고추장, 그때 입이 써 조청을 많이 넣었더니 달아. 할머니는 숟가락으로 검은 흙을 퍼내듯 퍼 옆에 밀쳐두고 안쪽에서 붉은 고추장을 떠 외숙모에게 내밀었다. 외숙모는 검지로 간장, 고추장을 콕콕 찍어 먹었다. 깊네요, 색이 고와요, 진하네요, 달디달아요, 했다. 간장, 묵은 고추장, 된장, 막장, 짠지, 젓갈 등 각각 독에서 올라온 곰삭은 내가 장독대를 묵직하게 떠돌았다. 외할머니와 외숙모는 크고 작은 스무 개 남짓 독에 새로 만든 옥양목 덮개를 덮고 무명실로 묶었다. 외숙모는 독 뚜껑을 독에 비스듬히 세워뒀다. 옥양목을 싸맨 장독이 흰 앞치마를 두른 외숙모처럼 단정했다. 할머니는 장독대 설거지를 한 후 아랫목에 엎드렸다. 나에게 허리를 밟으라고 했다. 할머니 허리는 나무 도마처럼 딱딱했고 편평했다. 나는 손바닥으로 벽을 짚고 등허리 위로 올라섰다. 할머니는 고춧물이 가시지 않은 손을 이마에 대고 엎드렸다. 할머니, 나 외탁했나? 그런 것 같아, 근데 왜? 그럼, 나도 일찍 죽나? 뭐? 누가 그래?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어? 골말 사람들이. 다들 일찍 죽어서 각성바지 여자 셋만 남았다고 했어. 각성바지가 뭐야? 할머니는 대답하기 싫은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가능한 힘을 빼고 밟다가 중심을 잘못 잡아 할머니 팔을 밟았다. 꾸욱. 순간, 뱀을 밟았던 감촉이 되살아났다. 그날 밤 내 얼굴에 열꽃이 피어올랐고 홍역을 앓았다. 꿈에 흰나비를 봤다. 상복을 입은 나는 흰나비를 잡아 내 머리에 핀처럼 꽂았다. 할머니는 삼짇날 고추장을 담가놓고 열흘 후에 돌아가셨다. 깨끗한 옥양목처럼 말끔하게 아픈 곳 없이 앓지도 않고 주무시다 돌아가셨다. 산벚나무에 꽃잎이 펼쳐지던 때였다.
-다음주에 2회가 이어집니다.
박정윤 소설가는 강원도 강릉 출생이며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에 《강원일보》 신춘문예, 「바다의 벽」으로 당선된 뒤 2005년에 「길은 생선 내장처럼 구불거린다」로 《작가세계》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프린세스 바리』로 제2회 혼불문학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프린세스 바리』, 『목공소녀』, 『연애독본』, 『나혜석 , 운명의 캉캉』, 『꿈해몽사전』 등이있다. [박정윤 소설가의 유리정원] 환상 소녀 1회
[아이즈앨범] 길고 긴 터널의 끝
길고 긴 겨울의 북풍 한설 끝에 봄이, 아주 벅찬 그리하여 완전한 봄이 왔습니다. 너무나 간절하게 간절하게 기다리고 기다리며 애태우던 절망의 그 절망이 사라지고 매화, 그 희망의 봄이 왔습니다.
'아이즈 앨범' 1999년 어느 겨울 새벽
아주 추운 어느 새벽 나의 밤의 미행은 계속되었고 갑자기 친구가 나타났다 외투를 벗어주고 싶었지만 야박하게도 렌즈 노출이 3분을 넘어가고 있었다.파르르 떠는 몸의 파동과 온기를 나눌 연민의 차이처럼 찰라가 만든 결과 뒤 밀려드는 타자들의 고통이 어두웠다. 오늘처럼 쇄골이 시리면 생각나는 그 겨울 그 시간... *2001년 사진전, ...
얼어 붙은 땅에 노란 납매 그리고 동백
꽁꽁 얼어 붙은 날씨였으면 더 신기하고 감격으로 채워졌을 텐데...대한민국이 얼어붙고 혼란스러운 계절납매와 동백이가 핀 1월 따뜻한 봄을 기다려 본다
[아이즈앨범] 첫눈이 말하는 폭설 이야기
큰눈이 내려주었다차는 차대로 엉거주춤사람은 사람대로 조심조심건물들도 내리는 눈에 모서리를 잃어간다모두가 흐려지는 날인데눈 녹은 자리에 다시 큰눈 내리고내리는 만큼 길이 질퍽해져도입가에 번지는 웃음이 있다첫눈이 많이 왔다는 말과 첫눈이 빨리 왔다는 말이 있다오늘 몇 시에 나왔냐는 물음과 퇴근길은 괜찮겠냐는 물음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