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박정윤 소설가의 유리정원] 환상 소녀 1회
  • 박정윤 소설가
  • 등록 2025-02-22 00:00:01

기사수정


허투루 들었다.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흘려들었다. 삼짇날 흰나비 보면 상복 입고 호랑나비, 노랑나비 보면 웃을 일 생긴다. 외할머니는 장독대에서 독을 닦다 치맛자락에 앉은 흰나비를 쫓으며 말했다. 벌써 나비가 있네요, 사월인데. 날이 덥긴 덥네요. 내 키만 한 독에 붉은 고추장을 퍼 담은 외숙모는 붉은 물로 더럽혀진 앞치마를 벗고 새 앞치마를 둘렀다. 구름에 헹군 것처럼 희고 빳빳했다. 누가 본다고. 외할머니는 앞치마 허리끈을 묶고 있는 외숙모를 못마땅한 듯 쳐다봤다. 누가 봐야 하나요? 제 천성이 그런걸. 고와, 고와서 그러지, 더 늦기 전에 내 니를 쫓아내야 할 텐데. 가라, 가. 할머니는 툭하면 외숙모를 쫓아낸다고 말했다. 할머니의 지르는 목청에 내 손을 피해 장독을 타 넘던 흰나비가 바람 속으로 달아났다. 나는 조청 묻은 손으로 두 눈을 가렸다. 그럼, 흰나비 봤을 때 얼른 눈 가리고, 민들레 번지는 들판으로 호랑나비 노랑나비 찾으러 가야 하나. 나는 나비 흉내를 내며 할머니 앞에서 팔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뱀 밟지 마라.” 할머니가 물앵두나무 그늘진 우물가에서 고춧물 든 붉은 손을 씻으며 하는 말을 허투루 들었다. 그래서 뱀을 밟았다, 뒤란 장독대에 핀 진달래를 꺾다가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뱀은 기지개를 켜듯 녹색 몸을 일자로 늘렸다. 홀쭉하고 가느다랬다, 파처럼. 무심결에 밟았다. 꾹. 물컹하면서도 단단한 야릇한 감촉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어어, 할머니. 나 뱀 밟았어." 꿈틀거리던 녹색 뱀은 흙을 누르며 꽃나무 그늘로 사라졌다. 할머니는 내 발목을 잡고 이리저리 돌리며 살폈다. "그르게 새겨듣지 그랬어." " "할머니 뱀을 밟으면 어떻게 되나? 어?" 할머니는 대답 없이 손 주먹으로 허리를 두들기며 먼 하늘에 몰려 있는 구름의 위치를 가늠했다. 


외할머니는 장독의 낡은 덮개를 죄 벗겼다. 독에 빠질 듯 허리를 숙이고 독 안에서 하얗게 굳은 소금을 걷어내고 검은 액체를 국자로 펐다. 니 시할머니 되는 양반이 지은 간장이다. 요건 재작년 니랑 같이 해 담은 더덕장아찌네, 이거 빨리 먹어 치워야 하는데. 이게 니 서방 군에 가던 해 담근 고추장, 그때 입이 써 조청을 많이 넣었더니 달아. 할머니는 숟가락으로 검은 흙을 퍼내듯 퍼 옆에 밀쳐두고 안쪽에서 붉은 고추장을 떠 외숙모에게 내밀었다. 외숙모는 검지로 간장, 고추장을 콕콕 찍어 먹었다. 깊네요, 색이 고와요, 진하네요, 달디달아요, 했다. 간장, 묵은 고추장, 된장, 막장, 짠지, 젓갈 등 각각 독에서 올라온 곰삭은 내가 장독대를 묵직하게 떠돌았다. 외할머니와 외숙모는 크고 작은 스무 개 남짓 독에 새로 만든 옥양목 덮개를 덮고 무명실로 묶었다. 외숙모는 독 뚜껑을 독에 비스듬히 세워뒀다. 옥양목을 싸맨 장독이 흰 앞치마를 두른 외숙모처럼 단정했다. 할머니는 장독대 설거지를 한 후 아랫목에 엎드렸다. 나에게 허리를 밟으라고 했다. 할머니 허리는 나무 도마처럼 딱딱했고 편평했다. 나는 손바닥으로 벽을 짚고 등허리 위로 올라섰다. 할머니는 고춧물이 가시지 않은 손을 이마에 대고 엎드렸다. 할머니, 나 외탁했나? 그런 것 같아, 근데 왜? 그럼, 나도 일찍 죽나? 뭐? 누가 그래?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어? 골말 사람들이. 다들 일찍 죽어서 각성바지 여자 셋만 남았다고 했어. 각성바지가 뭐야? 할머니는 대답하기 싫은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가능한 힘을 빼고 밟다가 중심을 잘못 잡아 할머니 팔을 밟았다. 꾸욱. 순간, 뱀을 밟았던 감촉이 되살아났다. 그날 밤 내 얼굴에 열꽃이 피어올랐고 홍역을 앓았다. 꿈에 흰나비를 봤다. 상복을 입은 나는 흰나비를 잡아 내 머리에 핀처럼 꽂았다. 할머니는 삼짇날 고추장을 담가놓고 열흘 후에 돌아가셨다. 깨끗한 옥양목처럼 말끔하게 아픈 곳 없이 앓지도 않고 주무시다 돌아가셨다. 산벚나무에 꽃잎이 펼쳐지던 때였다.

-다음주에 2회가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박정윤 소설가는 강원도 강릉 출생이며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에 《강원일보》 신춘문예, 「바다의 벽」으로 당선된 뒤 2005년에 「길은 생선 내장처럼 구불거린다」로 《작가세계》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프린세스 바리』로 제2회 혼불문학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프린세스 바리』, 『목공소녀』, 『연애독본』, 『나혜석 , 운명의 캉캉』, 『꿈해몽사전』 등이있다. [박정윤 소설가의 유리정원] 환상 소녀 1회

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포토/영상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최신뉴스더보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수출입동향] 2025년 12월, 수출 7000억 달러 시대 개막…반도체 1734억 달러로 역대 최대 대한민국 수출이 AI 열풍을 타고 7000억 달러 벽을 넘으며 역대 최대 실적을 거뒀다. 2025년 연간 수출액이 전년 대비 3.8% 증가한 7097억 달러를 기록한 것이다. 일평균 수출도 26.4억 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글로벌 보호무역주의 심화와 미국의 관세 장벽 등 대외 악재를 뚫고 이뤄낸 성과다.무역수지는 체질 개선에 성공하며 연간 780..
  2.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비빔국수 비빔국수를 시켜 놓고 끼니때마다 비빔국수를 먹을 수 있다면 행복이겠다 싶다가 나는 왜 이 비빔국수가 좋을까 자문하다가 비빔이라는 말에서섞임에 백기 든 사람처럼 잠깐 헝클어지다가 갓 나온 비빔국수를 젓가락으로 뒤섞는다 설기 썬 상추와 채 썬 오이 위에 앙증맞게 얹힌 한 알의 메추리알까지 흰 면을 슬몃슬몃 내주고 무서움도 매...
  3.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나비 가늘고 긴 다리는 망설이고 있었다향기가 더듬이를 떠날 때까지아무도 보지 않는데 가끔은양면을 펴서 평평하게 엎드렸다가꽃빛에 반해서 얼굴을 대는 동안바람은 날개를 붙잡고 꽃대는 휘청거려어디선가 물방울도 듣고 있는펴졌다 구부러지는 입의 모양모았다가 벌어지는 어깨가 넓어진다꽃가루가 묻으면서 공중에서 깊게 무늬들이 박.
  4. [한국은행 경상수지] 2025년 11월 122억 달러 흑자...반도체 슈퍼사이클에 조선업 훈풍 2025년 11월, 대한민국 경상수지가 122억4000만 달러 흑자를 기록하며 1~11월 흑자 규모를 1018억2000만 달러가 됐다. 수출은 전년 동월 대비 5.5% 증가한 601억1000만 달러를 기록하며 외화 유입을 주도했고, 수입은 468억 달러로 0.7% 감소했다. 수출은 늘고 수입은 줄어드는 구조 속에 상품수지는 133억1000만 달러 흑자를 달성하며 전체 경상수지 개선을 ...
  5. [수출입동향] 2025년 12월 수출 695억 달러로 역대 최대…반도체가 끌고 무선통신기기가 밀었다 2025년 12월 대한민국 수출이 새 역사를 썼다. 반도체 업황 회복과 무선통신기기의 선전에 힘입어 지난달 월간 기준 역대 최대 수출 실적을 갈아치운 것이다. 수출액은 전년 동월 대비 13.3% 증가한 695억 달러를 기록하며 월간 기준 역대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2025년 6월 이후 7개월 연속 이어진 증가세다.수입은 4.6% 늘어난 574억 달러를 기록했..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