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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레가 만난 사람] 분단의 시대를 새기는 목판화가 홍선웅 2편
  • 고요레 기자
  • 등록 2025-07-05 06:49:50
  • 수정 2025-07-07 23: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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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부 <매향, 차향, 목향이 나는 사람>

운림산방 일지매와 홍선웅 선생님



 올해로 43년째 목판화를 하고 있는 홍선웅 작가의 작업실이 있는 김포시 문수산 아래 보구곶리는 눈에 보이는 풍경이 그대로 분단의 풍경이다. 모내기가 한창인 5월, 다시 찾아간 작업실에서 작가와 나눈 대화를 1부 <분단의 시대를 걷다>(2025.06. 24. 기사 참조)에 이어  2부 <매향 차향 목향이 나는 사람>으로 싣는다.



 선생님 마당에는 매화나무가 아홉 그루나 있고, 2층에는 차실이 따로 있군요. 2008년에는 인천신세계갤러리에서 <차와 매화> 전시도 하셨지요. 차와 매화를 늘 가까이 하시는 거 같은데, 좋아하시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1996년도인가 봐요. 해인사 학감스님이 제 도록을 보고 연락하셨어요. 이틀간 해인사에 머물면서 종일 차를 마셨어요. 녹차와 보이차를 마셨는데, 돌아올 때 차와 함께 찻잔, 찻주전자를 챙겨주셨어요. 그때부터 차를 마시기 시작했어요. 


 홍선웅, 매화 찻자리, 목판다색, 59.5 x 52.5cm, 2022


 본격적인 차 공부는 한국차인연합회에서 했어요. 연합회에서 발간하는 <차인>지에 ‘차문화 판화기행’을 연재했는데, 연재를 마친 후 본격적으로 차와 도자기 수업을 들었지요. 차에 대한 이론적 학습은 이 때부터라고 볼 수 있어요. 


 이곳 차실에는 녹차부터 백차, 청차, 홍차, 보이차 등 많이 있어요. 봄이면 하동 악양면에서 제다한 우전을 많이 마셔요. 중국 녹차인 호북성 은시에서 증청한 은시옥로나 안길백차의 단향에 빠지기도 해요. 그중 가장 좋아하는 건 청차예요. 무이산 정암 육계나 노총수선 그리고 광동성 봉황단총의 통천향이나 송종향을 좋아해요. 겨울에는 고수생차나 숙차도 많이 마십니다. 손님들이 오시면 차는 늘 후하게 대접하지요. 손님과 다담을 나누는 시간이 참 좋거든요.


 2008년도에 인천 신세계백화점에서 전시한 <차와 매화>전은 '차문화 판화기행'을 연재할 때 제작한 작품을 중심으로 전시한 것으로, 대부분 다색수성목판화 작업이었죠.



 선생님 작품에는 차와 매화를 주제로 한 작품이 많아요. 특화된 사물의 선택이란 작가에게 분명 새로운 미의식의 접근이란 상상을 갖게 해주는데, 작가로서 차와 매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가요? 


 차와 매화에 빠지게 된 시기는 거의 같아요. 1995년 이곳에 화실을 마련하고, 열심히 판각 기행을 다녔어요. 옛날 판목이 있는 장경각이나 판고를 찾아다니며 고판화 연구에 전념할 때에요. 이때 다니며 쓴 기행문과 그림을 월간 ‘우리교육’과 ‘황해미술’에 연재했어요. 그리고 이 글들을 모아서 2001년에 미술문화에서 <홍선웅의 판각기행>이란 산문집을 출간했지요.


 새싹이 움트는 계절이 오면, 스케치하러 다니기가 좋아요. 봄 판각 기행을 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매화를 만나게 되었고, 매화가 점점 좋아지다 보니 매화 절기가 오면 전국의 매화를 찾아다니게 되었어요. 지역마다 만개 시점이 달라 두세 번 찾는 일은 보통이에요. 2월 중순부터 금둔사를 기점으로 4월 초 선암사와 도산서원 매화가 필 때까지 매화에 묻혀 살았으니까요. 


 어느 날 밤 9시 뉴스 일기예보에서 “내일 아침 한때 여수 순천지방을 중심으로 눈이 한 차례 오겠습니다” 라는 말을 듣자마자, 담요와 사진기, 스케치 도구를 싣고, 화실에서 순천으로 향했어요. 순천 금둔사에는 지금쯤 만첩홍매가 피어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일기예보대로 진짜 눈이 온다면 설중매를 찍을 수 있으니까요. 금둔사에 도착해서 조금 기다리니 진짜로 눈이 쏟아지는 거예요. 사진을 다 찍고 조금 있으니까 쌓인 눈이 순식간에 녹아요. 그 사진은 ‘차와 매화’ 도록에 실려 있어요. 


홍선웅, 선암사의 봄, 목판다색(유성+수성), 60.0x45.0cm, 2023


 지금은 그런 열정이 없어요. 올해는 기상이변으로 4월에 매화가 피고 눈도 많이 왔지만, 뒤늦게 순천 복음교회 홍매정원과 선암사 전통매, 청매실농원, 화엄사 홍매를 보고 왔어요. 마침 화엄사 홍매는 만개 시점이라서 각황전 전체를 붉은 물감으로 물들여 놓은 듯한 장관이었어요. 이 곳의 홍매는 통도사 영각 앞의 자장매와 함께 우리나라 홍매의 으뜸으로 여겨집니다.  


화엄사 홍매(2025)


 매화는 성품이 깨끗하고 맑아요. 향기 또한 청아하면서 빛나고요. 그래서 고고해요. 선비들은 추위 속에서도 맑고 은은한 향기를 품으며 피어난 이런 매화의 군자다운 깨끗한 품성을 닮고 싶어 했지요. 그래서 매화는 화훼 중에서 늘 1등품에 속했어요. 벚꽃처럼 화려하지 않고, 겸손해 보이잖아요. 그래서인지 퇴계 선생도 매화 앞에서는 늘 겸손했어요. 매형, 매선, 설중군자, 신선, 은자, 진인으로 매화를 인격화했어요. 매화를 절대 불변의 존재자로 품격화시킨 분이 바로 퇴계 선생이에요.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길 잊었더니, 옷깃에는 향기 가득 달 그림자 몸에 닿네” 이 시 구절처럼 밤새도록 매화 곁을 떠나줄 몰랐던 퇴계는 매화와 일체동심을 이루는 모습을 보이지요.


 그렇다면 우리 예술가들은 매화와 같은 사물에 대해 어떤 접근 방식과 이해가 필요할까요?  철학적 고민과 함께 창작 방법론의 문제까지도 생각해야 되니까요. 사물을 올바로 이해하고 표현하는 건 다양해요. 매화 그림을 보면서 향기가 있네 없네 하는 것은 작가가 사물에 얼마만큼 접인했는가를 말하는 철학적 사고와 기술의 수위 문제이겠지요. 다시 말하면 사물과 얼마만큼 일체동심을 이루는지는 해석론에 대한 분석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문인 권헌(1713~1770)은 <묵매기>에서 “매화가 범상치 않은 화훼이지만, 단순히 대상물로 바라본다면 매화와 나는 서로 다르다”라고 했어요. 사물과 사물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차이가 있기에 차이의 간격을 좁혀야만 매화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권헌은 “상리(常理)로서 대상을 바라볼 때 매화와 나는 일체동심을 이루며, 매화의 빼어난 운치를 취할 수 있다"고 했어요. 권헌이 보는 상리란 있는 그대로 무위의 법이며, 사물의 본성에 다가간 상도(常道)임을 말합니다. 분명 노장의 논리 한가운데 있지만, 관념을 배제한 채 있는 그대로의 존재 가치를 통해 사물의 본성에 접근하라는 의미가 더 커 보입니다. 즉 사물을 사유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가치를 삿되지 않은 중정으로 접인하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허공에 선 하나를 긋더라도 관념적인 굴레로 끌려가지는 말라는 논리가 아닐까요? 


 매화를 진(眞)과 정(情)으로 애지중지 대하는 퇴계 선생의 마음은 그의 매화시를 통해 감동으로 다가와요. 밤 늦도록 매화 언저리를 돌며, 매화를 완상하는 그의 모습에는 매화를 즐긴다는 차원이 아니라 매화에 듬뿍 빠져 매화와 일체동심을 이루는 모습이 보여요. 진과 정의 마음으로 매화라는 실체에 다가섰을 때 나와 매화는 하나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요. 


 하이데거도 “사물은 독특한 존재 방식을 가지고 존재하기에 ‘눈앞에 있음’ 만으로는 사물의 실재를 파악할 수 없다”고 했어요. 매화가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맑은 향기를 피우는 것은 타자와 접촉하는 일종의 방식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권헌의 상리로서의 접근이나 퇴계의 진과 정에 의한 절대적 믿음과 사랑, 또는 레비나스의 몸을 낮춰 타자 중심으로 대하는 윤리성 등으로 대상에 접인하는 방식을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요.   


홍선웅, 산다화(山茶花), 목판채색, 142.0 X 121.0cm, 2011



  목판화는 역사가 깊어 전통문화로서의 가치를 담고 있으면서도 현대판화가들이 선호하는 재료입니다. 오랫동안 목판화만을 하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1966년 10월, 불국사 석가탑 2층 탑신부 사리공에 봉안된 금동사리외함에서 목판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었지요. 두루마리 형태의 권자본인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본입니다. 판화로 가장 오래된 것은 고려 목종10년(1007)에 개성의 총지사에서 홍철 스님이 간행한 <보협인다라니경>이 있는데, 소형 권자본이지만 앞부분에 판화가 있어요. 그 후로 <고려초조대장경>과 해인사 사간판인 <화엄경변상판화>가 있고요.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부모은중경>, <묘법연화경> 등 불교 경전에 목판 삽화가 실렸고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등 유교 경전에도 많은 목판화가 도판으로 실렸지요. 


 조선 말에는 전국 지도를 목판화 제작했으며, 대표적인 것이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이지요. 피나무 판목에 새겼는데 섬세한 각법이 뛰어나지요. 대한제국 시대에는 <초등 소학>, <유년 필독> 같은 아동용 교과서에 목판 삽화가 들어 있고요.  오세창의 대한민보에는 이도영이 만평을 목판화로 제작해 실었지요. 이도영은 <옥중화>라는 딱지본 소설에도 목판 삽화를 실어 대중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지요. 1930대와 40년대에도 시사 잡지나 문학지 표지에 판화가 실렸는데 목판화가로는 이병규, 정현웅, 손영기, 최은석, 이정, 윤세봉이 활동했어요.


 현대에 들어와서는 목판화 외에도 석판화, 동판화, 메조틴트, 디지털 프린트 등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는데, 그래도 역시 목판화 인구가 제일 많은 것 같아요. 주로 피나무나 자작나무 무늬목을 입힌 합판을 사용하는데, 아무래도 동판처럼 염산으로 부식시키지 않아도 되고, 나무니까 파기도 쉽고요. 쉽게 구해서 누구나 조각도로 팔 수 있는 것이 목판화입니다. 저도 1년에 한  두 번 화실에서 시민판화교육을 하는데, 어린이와 성인을 대상으로 해요. 판화찍기 오픈스튜디오인데, 이렇게 목판화는 대중과 가까워질 수 있는 재료지요.


  홍선웅, 인천10경-소래포구, 다색목판화, 68.0 x 54.0cm, 2010



  한국판화사를 시대별로 설명해주셨는데 작가로서, 근대 판화 연구자로서 앞으로 계획은 무엇일까요?


  분단 풍경에 대한 작업은 계속할 거예요. 분단 극복이라는 과제는 민족의 숙원 사업이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분단을 이용하는 사회악의 세력과 끊임없이 대립해야 해요. 그들은 분단을 정치화 도구화시키고, 자신의 이익만을 취하는 지배 권력으로 존재하면서 온갖 만행과 부정부패를 저지르거든요. 시민 사회는 양극화가 심해지고, 경제적 이익은 착취 당하기 일쑤이고요. 디올 백, 도이치 주가 조작, 양평 고속도로, 대장동 50억 5인방, 계엄령, 다이아몬드 목걸이 뇌물, 인천공항 마약 사건, 사법부 파동, 이게 다 누구의 짓인가요? 예술가로서 민족 공동체의 구성원임을 외면할 수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빠른 시일 안에 해야 할 과제가 있어요. 한국근대판화사 개정 증보판을 찍어야 해요. 원고는 거의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번 초판본에 빠진 자료가 많이 있어요. 증보판을 통해 보여주고 싶어요. 

 


선생님 말씀을 듣다 보니, 칼을 들어 새기시는 것이 우리 민족의 한 흐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장시간 좋은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계획하시는 일 잘 이루시길 바라며, 늘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홍선웅 선생님 약력

 1952년 진도에서 태어나 경기도 안성에서 성장했다. 중앙대학교에서 최영림 교수에게 서양화를 배웠고, 미림여고 미술교사로 재직 중 1985년 민중교육지 필화사건으로 해직되었다. 3년 후 복직되었으나 전교조 가입으로 다시 해직되었다. 1980년대 한국민족미술인협회 사무국장,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국제국장과 대변인을 거치면서 민중문화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심의위원(2006-2008), 인천문화재단 이사(2023-2025)를 역임했다. 

작품 소장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전북도립미술관, 일민미술관

                 인천문화재단, 파리 세르누치시립미술관, 퀼른 안파리나 화랑

저서 : 한국근대판화사(미술문화, 2014), 판각기행(미술문화, 2001)

논문 : 표지장정에서 출발한 판화가 이정(근대서지19호, 2019)

          옥중화에 나타난 이도영의 목판화 도상연구(근대서지 17호, 2018) 

          일제강점 초기의 판화와 신찬대방초간독(목판2호, 2017)

          한국 근현대판화의 흐름과 이상(理想), (<붉은 꽃이 피다(Red Blossom> 도록 서문, 

       일민미술관,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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