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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 어향숙 시인
  • 등록 2025-05-25 02:55:33
  • 수정 2025-05-25 07:5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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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꾹 쑥꾹 쑥꾹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한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재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속 깊은 곳에서 쑥꾹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 밖에 섰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박철 시인의 시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전문



이 시는 박철시인의 시집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에 실려있다.


시인은 돈이 안 되는 일에 열광하고 몸과 마음을 다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부류들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현실과 이상이 종종 부딪히곤 한다. 


아내의 심부름으로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을 갚으러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비가 내린다. 그 막막하고 황당한 현실 앞에 "슈퍼"가, 그것도 "럭키슈퍼"가 유혹을 한다. 그 앞에 앉아 벌컥벌컥 맥주를 마시지만 갈증은 여전하다. 다시 한 번 아내는 기회를 주지만 그 기회마저도 문밖 동그마니 홀로 서있는 자신 같은 "재스민" 한 그루를 사는데 써버린다. 그리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라고 스스로 위안을 한다. 가난한 현실에서 '순수'를 향한 마음이 삶의 초라함을 상쇄하고 시인을 지탱해 준다고 해야 할까.


체코 태생의 전설적인 하프시코드 연주자 '주자나 루치지코바'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나치에 의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끌려갔다고 한다. 훗날 풀려났을 때 그녀는 그 잔혹하고 암담한 시간들을 바흐의 음악들을 마음 속으로 연주하면서 견뎌냈다고 말했다.


가혹한 현실에서 '순수'는 '자기기만'일 수도 있지만 깊은 의미에서 '저항적 힘'을 갖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뚫지 못한 무엇이, 삶의 결핍이, 그럼에도 순수를 향한 마음이 시를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주위는 힘들어도 시인에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다. 


불완전한 삶이지만 포장을 걷어내고 고뇌한 흔적이 있는 이런 시에 독자는 더 마음이 간다.

덧붙이는 글

어향숙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김유정 신인문학상'(2016)을 받았다. 시집으로 《낯선 위로가 눈물을 닦아주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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