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건망증1
  • 어향숙 시인
  • 등록 2025-06-01 01:47:14
  • 수정 2025-06-04 13:47:55

기사수정


창문을 닫았던가

출입문은 잠그고 나왔던가

계단을 내려오면서 자꾸만 미심쩍다

다시 올라가 보면 번번이

잘 닫고 잠가놓은 것을

퇴근길 괜한 헛걸음이 벌써

한두번이 아니다


오늘도 미심쩍은 계단을

그냥 내려왔다 누구는

마스크를 쓴 채로 깜박 잊고

가래침도 뱉는다지만 나는

그런 축에 낄 위인도 못된다

아마 잘 닫고 잘 잠갔을 것이다


혼자 남은 주막에서

술값을 치르다가 다시 미심쩍다

창문을 닫은 기억이 없다

출입문 잠근 기억이 전혀 없다

전기코드도 꽂아둔 채로

그냥 나온 것만 같다

다들 가고 없지만 누구와도

헤어진 기억이 없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보통 일이냐

매일같이 닫고 잠그고 뽑는 것이

보통 일이냐, 그래, 보통 일이다

헤어진 기억도 없이

보고 싶은 사람 오래오래

못 만나는 것도 보통 일이다

망할 것들이 여간해서 안 망하는 것쯤은

못된 짓 못된 짓 끝도 없는 것쯤은

열어놓고 꽂아놓고 사는 것쯤은

얼마든지 보통 일이다


닫고잠그고가고보고싶고

다 보통 일이다 술기운만 믿고

그냥 집으로 간다 집에서도 다시

닫고잠그고뽑고열고마시고끄고그리고

깜박깜박 그대 보고 싶다


-정양 시인의 시 '건망증1' 전문



이 시는 《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에 실려있다.


'돌아서면 잊어버린다'는 말이 실감나는 요즘이다. 출근하다가 레인지 불을 안 끄고 온 것 같아 다시 돌아가 확인한 적이 여러 번 있다 보니 아주 공감가는 시다. 


시처럼 보통 일이라도 여겼던 "만나고 헤어지는 것"을, "닫고 잠그고 뽑는 것"을 깜박하게 되는 날이 점점 많아진다. 비우기 위한 과정이라고 위로해 보지만 우선 현실이 불편하다. 


'무딘 붓이 총명함을 이긴다(鈍筆勝聰둔필승총)'는 말이 있다. 앞으로 기억력에 의존하지 않고 메모하는 습관도 길러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마지막 행이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반복되는 건망증 속에서도, 건조한 일상 속에서도 보고 싶은 그대만은 잊을 수 없다. 늘 모든 존재 너머에서 깜빡깜빡 빛나고 있다. 기억의 간극 속으로 사라진 사람들의 부재가 뭉클한 그리움으로 남는다. 



*2025년 5월 마지막날, 시집 제목처럼 '살아있는 것들의 무게' 를 내려놓고 하늘나라로 가신 정양 시인의 명복을 빌며···

덧붙이는 글

어향숙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김유정 신인문학상'(2016)을 받았다. 시집으로 《낯선 위로가 눈물을 닦아주네》가 있다.

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포토/영상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최신뉴스더보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모과의 귀지를 파내다 모과에 핀 얼룩을 손으로 쓱쓱 문지르니점액질이 끈끈하게 배어 나온다얼굴에 핀 검버섯처럼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반짝거린다 모과의 귀에 면봉을 깊숙이 넣으니갈색의 가루가 묻어 나온다너는 그것이 벌레의 똥이라고 우기고나는 달빛을 밟던 고양이들의 발소리라 하고천둥소리에 놀라 날아들던 새의 날갯짓 소리라 하고새벽바람에 잔..
  2. 11월 '코리아세일페스타' 가전 라이벌전···삼성 'AI·상생' vs LG '할인·구독' 정면승부 대한민국 최대 쇼핑 축제 '2025 코리아세일페스타'가 11월 1일 시작되는 가운데, 삼성전자와 LG전자가 10년 연속 행사에 참여하며 대대적인 할인 경쟁에 돌입한다. 삼성전자는 AI 가전 패키지와 소상공인 상생 혜택을 전면에 내세웠고, LG전자는 높은 할인율과 구독 서비스를 무기로 맞불을 놓으며 11월 소비자들의 지갑 공략에 나선다.삼성...
  3. [새책] 번아웃 겪는 2040세대를 위한 제안 《셀프 콤마》···하루 5분 '일상돌봄 코칭' 끝없는 경쟁과 정보 과잉 속에서 번아웃과 무기력을 호소하는 2040세대가 늘고 있다. '더 애써야만 살아남는다'는 압박감은 우리도 모르는 새에 소중한 자신을 갉아먹는다. 열심히 달려왔는데 왜 마음은 늘 허탈하고 공허한 것일까?새로운제안에서 15년 차 HRD(인적자원개발) 교육전문가 이종미의 첫 책 《셀프 콤마》를 펴냈다. 과부하...
  4.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접히다 "지금 화장 중입니다"승화원 전광판에는 뜨거운 불길이 일고한곳에 모인 우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말이 없었다전광판이 바뀌고눈물이 마르기 전 냉각을 마친 어머니를 모시러 갔다육중한 철문이 열리고철제 침대가 끌려 나왔다붉은 장미로 채운 관과 황금빛 수의는 간 곳 없고주검을 눕힌 그 자리타다만 뼈 몇 개와 재만 놓여 있...
  5. [새책] 20대 청년이 쓴 《마르크스주의 입문》···세계 바꿀 가장 날카로운 무기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되는 지금, 왜 다시 마르크스주의를 읽어야 할까? 1%의 부자가 전 세계 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불평등이 지속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가 계속되면 마르크스주의는 다시 부활할까?오월의봄에서 20대 청년 이찬용이 쓴 《마르크스주의 입문》을 펴냈다. 그동안 나온 마르크스주의 책들은 대부분 오래됐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