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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윤 소설가의 유리정원] 트레일러 소녀 1편
  • 박정윤 소설가
  • 등록 2025-07-05 06:5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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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집이 배달되었다. 하얀 색의 집은 마음에 들었다. 두 달 동안의 지옥 같았던 시간을 잠시 잊을 정도로 예뻤다. 코가 잘린 코끼리 얼굴 같은 집을 보자마자 나는 홀딱 반했다. 집은 무어 아저씨가 끌고 왔다. 무어 아저씨의 렉스톤에 연결되어 따라온 바퀴달린 집은 새집 티가 났고 윤이 돌았다. 무어 아저씨는 차에서 내려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올려놓고 미네랄워터를 마셨다. 아빠와 나는 집을 한 바퀴 돌았다. 무어 아저씨는 검지에 걸고 있던 열쇠로 잠금장치를 풀었다. 리모컨을 누르자 출입문이 치마를 걷어 올리듯 스르륵 들렸다. 우리는 우유가 흘러내리는 것 같은 미끄러운 계단을 밟고 안으로 들어갔다. 조립은 여기서 했어도 유럽 트레일러 부품 중 최고인 엑슬과 커플러야. 무어 아저씨는 자신의 동생 회사에서 만든 것이라고 강조했다. 통바디가 부식하려면 만년이 걸린대. ‘무어 아저씨, 제가 만년을 살 것도 아닌데요, 뭐.’ 생각보다 꽤 큰데. ‘크다니, 아빠, 내 방보다 작은데 이곳에 욕실과 부엌이 다 있다는 거잖아.’ 2종 면허로 가능한가. 그럼, 자네 에쿠스잖아, 그거면 충분해. ‘무어 아저씨, 에쿠스는 없어요. 아빠한테는 달랑 1톤짜리 봉고 트럭 밖에 없어요. 저기 보이죠, 저 낡고 초라한 트럭이 이제부터 아빠의 밥벌이래요.’ 그런데 어디 여행 가려고? ‘여행은 무슨 여행? 우리가 살아가야할 집인걸요.’ 150리터 물탱크와 온수기 시스템이 있어. 물탱크를 수도로 연결하는 선을 장착해 달랬는데, 전기 공급도 가능하게. 아, 맞아 장착 했다더라 연결만 하면 된다고 했어. 그런데 정말 어디 오래 가려고? ‘네, 무어 아저씨. 그러니 아빠 곤란하게 하지 말고 그만 관심 끄고 벤자민 무어 페인트 가게로 가세요. 가서 친환경이고 칼라가 백만 가지나 되는 값비싼 페인트 파세요.’ 에쿠스를 끌고 와 내가 킹핀 연결해줄게. 내가 그걸 못하겠나. 하긴 왕년에 25톤 트럭도 끌었었지, 후진 할 때는 좀 어렵더라. 무어 아저씨는 머리 위에 올려놓았던 선글라스를 바로 썼다. 무어 아저씨가 가자마자 아빠는 집의 윈도우를 열었다. 윈도우에는 방충망까지 덧대어져 있었다. 나는 수도를 틀어보았고 미니 냉장고를 열어봤다. 트럭에 집을 연결한 후 아빠가 말했다.


“가자, 집을 놓을 곳으로, 바다로.”


엄마가 죽은 후,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내 방에서 액자를 떼어내는 거였다. 양털 모자를 쓰고 홀딱 벗은 백일 사진, 빨간 원피스를 입은 유치원 때의 사진, 학사모를 쓰고 찍은 사립학교 졸업 사진, 우에노 공원에서 판다를 손짓하고 있는 사진, 싱가포르 바닷가 멀라이언 동상 앞에 서 있는 사진, 앙코르 왓트에서 찍은 사진, 피아노와 바이올린 독주회, 미술대회 시상식 사진, 스키장에서 찍은 사진, 필드에 나가 골프채를 휘두르는 사진, 승마복을 입은 사진, 핫핑크 비키니를 입은 사진, 외국어 고등학교 입학사진. 서른 개도 넘는 사진이 내 방 벽과 테이블, 피아노와 콘솔에 붙어 있거나 놓여 있었다. 나는 방 가운데에 있는 소파를 구석으로 끌어내고 양탄자 위에 액자를 던졌다. 첫 번째 액자가 떨어질 때와 두 번째, 세 번째 액자가 떨어질 때 소리가 각각 달랐다. 나무, 청동, 도금된 액자틀과 유리조각이 쌓일 때마다 소리는 점점 무뎌졌고 화가 사그라졌다. 액자를 모조리 던져버리고 나서야 나는 차분해졌다. 나는 방에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서른 명이 넘는 내가 바글바글 떠들어댔고 생각이 나뉘어졌다. 서른 명이 넘는 내가 공부를 했고, 서른 명도 넘는 내가 공부를 하고 있는 나를 감시했고 피아노를 쳤고 엄마의 약병에서 꺼내온 수면제를 함께 나눠 먹었다. 수면제를 먹어야만 잠을 잘 수 있었다. 꿈에서도 서른 명이 넘는 내가 여기저기 쏘다녀서 잠에서 깨면 골치가 아팠고 몸을 갈라놨다가 바늘로 꿰매놓은 것처럼 너덜거렸다. 양탄자를 돌돌 말아 백 리터짜리 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리고 손을 씻었다. 비로소 혼자만이 가득한 방에 앉아 피아노를 쳤다. 캐논 변주곡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월광 소나타를 연달아 연주하고 난 뒤 책상에 앉아 공부를 했다.  

역삼동 상록회관을 지나 르네상스 호텔 앞 테헤란로에 진입하자마자 차가 꽉 막혔다. 아빠의 낡은 트럭이 날아갈 듯 세련된 트레일러를 끌고 가자 끼어들기를 하던 차들이 주춤거렸고 운전자들이 신기한 듯 목을 빼고 쳐다보았다. 경복 아파트를 지날 때 그곳에 사는, 같은 어학원에 다녔던 남자애의 얼굴이 떠올랐다. 작년, 그 애와 선정릉을 산책하다 정현왕후 윤씨의 무덤 앞에서 키스를 했다. 서툴렀고 침이 묻어 불쾌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또래 친구들에 비해 늦은 경험이기에 나는 수위를 높이고 싶었지만 그 애는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시시해서 접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미리 정리해서 다행이다. 복잡한 것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깐. 논현동 고가구 골목 앞에 신호가 걸려 서 있을 때 아빠와 나는 동시에 같은 곳을 쳐다보았다. 유럽 가구를 수입해서 파는 가구점은 엄마의 친구가 하는 곳이었다. 그녀는 유능한 변호사의 변호 덕에 혐의 없음으로 풀려났고 지금 유럽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빠는 경부고속도로를 타기 전에 피곤하면 차를 세울 테니 트레일러 침대칸에서 자라고 말했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엄마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나는 꼭 복학을 해야 하니깐 아빠에게 돈을 꾸준히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분명 많이, 가 아닌 꾸준히, 라고 강조했다. 애들이 중간에 휴학계 내고 외국 갔다 오고 그러니깐 나도 그런 줄 알거야. 그래, 다행이다. 아빠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을 내뱉었다. 나는 아빠가 좋아하는 답이 뻔한 퀴즈를 내고 상품을 주는 라디오 프로를 틀어놓았고 개그맨 흉내를 내며 아빠를 웃겨주고 까불었다. 우리는 휴게소에서 우동을 먹었다. 아빠는 휴게실 식당에서도 깨끗한 자리를 찾았다. 엄마와 다니던 습관이 몸에 배었다. 우동은 탄력 없이 풀어졌고 국물 맛은 밍밍했다. 우동을 먹고 나선 잠이 들었는데 좁고 딱딱한 의자에서 잠을 자서인지 단체 벌을 받는 꿈을 꾸었다. 아빠가 나를 흔들어 깨웠을 때는 룸미러 가득 해가 떨어지는 해질녘이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이른 봄날의 하늘이 온통 붉었고 트레일러는 하늘로 빨려갈 것 같았다. 그냥 이대로 아빠와 함께 붉은 하늘로 빨려 들어가도 좋을 것 같았다. 


-다음주에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박정윤 소설가는 강원도 강릉 출생이며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에 《강원일보》 신춘문예, 「바다의 벽」으로 당선된 뒤 2005년에 「길은 생선 내장처럼 구불거린다」로 《작가세계》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프린세스 바리』로 제2회 혼불문학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프린세스 바리』, 『목공소녀』, 『연애독본』, 『나혜석 , 운명의 캉캉』, 『꿈해몽사전』 등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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