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보았니, 무서운 것을 보았어요, 그건 꿈이란다, 그러니 어서 꿈에서 빠져나오렴, 어떤 꿈은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아요, 저기 무리에서 벗어나 천천히 날아가는 새가 보이니, 저렇게 뒤처진 새가 나쁜 꿈을 물고 날아갈 거야, 새에게 말해버려, 그리고 잊어라, 아이였을 때, 섬 근처에는 바닷물이 빠지는 끝 썰물이면 바다 가운데 모래언덕이 많이 생겨났어요, 모래언덕은 학교 운동장만큼 컸다가 들물이 시작되면 점점 작아졌어요, 그러다 만조 때면 바닷속에 잠겨버리는, 환상 같은 모래언덕이었어요, 섬주민들은 그것을 풀등이라 불렀어요, 언제부터인가 해안 근처에 모래를 퍼 담아 가는 배가 나타났어요, 배는 모래를, 모래를 계속 펐어요, 여자는 해안가에 앉아있었어요, 절망을 삼킨 것처럼 고개는 허공을 향해 쳐들었고 입은 저절로 벌어졌어요, 언제나 같은 자리에 앉아있던 여자가 사라졌어요, 바다와 모래를 아무리 뒤적거리고 파헤쳐도 찾을 수가 없었어요.
바보천치가 되었다. 감각은 굳었고 지각은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무엇을 봐도 생각과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시퍼런 바다가 날 것으로 들이닥쳤다가 모래사장을 훑고 빠져나가는 섬에서는 달의 인력을 헤아려 12시간 25분 주기로 물때를 계산했고 먼 바다에 서성이는 구름의 꼬리만 봐도 비의 시간을 예측했다. 좌대낚시를 위해 섬을 찾아온 이들에게 끝썰물과 초들물 시간을 알려줬고 낚싯대를 손봤고 쭈꾸미와 미꾸라지로 미끼를 준비했다. 황금 물때면 바다의 조류를 헤아려 그물을 던지는 아버지의 손길에 젓새우가 얼마나 끌려올지 우럭이 얼마만큼 잡힐지 예상했다. 장소가 나를 변화시켰다. 아니다, 장소가 아닌 병원에 누워 있는 아버지 때문이다. 아니다, 이곳에서 다시 만난 소요 때문이다. 붉은 양산을 쓴 여자의 손을 잡고 섬으로 왔던 빼빼 마른 몸을 휘청거리며 얼굴을 숙이던 소년, 소요 때문이다. 지금의 소요가 아닌, 소년이었던 소요 때문에, 그 소요의 손을 잡고 서너 시간 후면 바다 속에 잠길 모래 언덕을 파닥거리며 뛰어다니던 기억이 되살아나 쩔쩔매는 나는 바보천치가 되었다.
소나무에 기대 물을 바라보았다. 인디언 카누를 타고 있는 연인들이 내가 서 있는 구역을 지나쳐 갔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은 원래, 바다였다. 이곳 역시 하루에 두 번씩 만조와 간조가 생기던, 먼 바다의 바닷물이 흘러들어왔다가 빠지며 물고기를 이끌던 바다였다. 어디 바다에서 모래를 펐을까. 얼마만큼의 모래를 퍼부으면 바다를 메워 도시가 될 수 있을까. 바다를 매립 해 건설한 신도시의 공원에는 인공으로 이 킬로미터 길이의 강을 만들어 놨다. 바다였던 곳을 메웠다가 다시 그곳을 퍼내고 물을 채워 만든 강은 깊은 곳부터 서서히 원래의 바다와 경계를 허물고 내통할지 몰랐다. 내통되는 통로를 따라 물이 밀고 들어와 도시 전체가 바다에 잠기는 상상을 했다. 유독 이 공원 주위에는 층수를 헤아릴 수 없는 높은 빌딩들이 밀집되어 있었다. 높은 빌딩을 견뎌낼 만큼의 지반을 다지기 위해 퍼부어졌을 모래를 헤아리다 어지럼증이 났다. 강 중턱 기슭에는 토끼 숲을 조성해놓았다. 조악한 나무집을 하나 마련해 주었고 흙으로 도톰하게 만든 언덕에 구멍을 파놓았다. 토끼는 호기심 없이 인형처럼 앉아 몸을 움츠렸다. 새로운 굴을 파지 않았고 숲 관리자가 파놓은 굴 안을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카누에 올라 중심을 잡은 후 주황색 구명조끼를 벗었다. 출발지점에서 안전요원이 호각을 불며 구명조끼를 입으라 했지만, 여자는 못 들은 척했다. 여자를 마주 보고 앉은 남자가 노를 저었다. 거스를 것 없이 카누는 곧바로 중류로 내려왔다. 선착장 본부에서 무전이 왔다. 나는 호각을 불고 여자에게 구명조끼를 착용하라고 말했다. 여자는 양팔을 휘저으며 수영하는 포즈를 취했다. 수영을 잘한다는 표현 같았다. 인공으로 만든 강은 깊이가 삼 미터도 되지 않았고 강폭 또한 오 미터를 넘지 않았다. 카누가 뒤집혀도 강 둘레에 배치된 다섯 명의 안전요원 중 누군가 뛰어들어 구조할 것이었다. 인디언 카누는 캐나디언 카누와 달리 본체가 무거운 나무로 만들어져 노를 젓기 힘든 반면 배가 뒤집히는 경우가 없다고 했다. 과격한 행동을 하지 않는 한.
-계속-
박정윤 소설가
박정윤 소설가는 강원도 강릉 출생이며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에 《강원일보》 신춘문예, 「바다의 벽」으로 당선된 뒤 2005년에 「길은 생선 내장처럼 구불거린다」로 《작가세계》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프린세스 바리』로 제2회 혼불문학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프린세스 바리』, 『목공소녀』, 『연애독본』, 『나혜석 , 운명의 캉캉』, 『꿈해몽사전』 등이있다.
[아이즈앨범] 길고 긴 터널의 끝
길고 긴 겨울의 북풍 한설 끝에 봄이, 아주 벅찬 그리하여 완전한 봄이 왔습니다. 너무나 간절하게 간절하게 기다리고 기다리며 애태우던 절망의 그 절망이 사라지고 매화, 그 희망의 봄이 왔습니다.
'아이즈 앨범' 1999년 어느 겨울 새벽
아주 추운 어느 새벽 나의 밤의 미행은 계속되었고 갑자기 친구가 나타났다 외투를 벗어주고 싶었지만 야박하게도 렌즈 노출이 3분을 넘어가고 있었다.파르르 떠는 몸의 파동과 온기를 나눌 연민의 차이처럼 찰라가 만든 결과 뒤 밀려드는 타자들의 고통이 어두웠다. 오늘처럼 쇄골이 시리면 생각나는 그 겨울 그 시간... *2001년 사진전, ...
얼어 붙은 땅에 노란 납매 그리고 동백
꽁꽁 얼어 붙은 날씨였으면 더 신기하고 감격으로 채워졌을 텐데...대한민국이 얼어붙고 혼란스러운 계절납매와 동백이가 핀 1월 따뜻한 봄을 기다려 본다
[아이즈앨범] 첫눈이 말하는 폭설 이야기
큰눈이 내려주었다차는 차대로 엉거주춤사람은 사람대로 조심조심건물들도 내리는 눈에 모서리를 잃어간다모두가 흐려지는 날인데눈 녹은 자리에 다시 큰눈 내리고내리는 만큼 길이 질퍽해져도입가에 번지는 웃음이 있다첫눈이 많이 왔다는 말과 첫눈이 빨리 왔다는 말이 있다오늘 몇 시에 나왔냐는 물음과 퇴근길은 괜찮겠냐는 물음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