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들어서면 대문 옆에 헛간이 서고처럼 서 있는데 처마 끝에 도서 대여목록 카드처럼 여섯 자루의 호미가 꽂혀 있다. 아버지 호미는 장시간 반납하지 않은 책처럼 한번 들고 나가면 며칠씩 밤새고 돌아온다. 산비탈을 다듬는지 자갈밭을 일구는지 듬성듬성 이가 빠져 자루만 조금 길면 삽에 가까운 호미, 그 옆에 어머니 호미는 가장 많이 빌려 보는 연애소설 같다. 테이프 여러 번 붙인 표지에서 파스 냄새가 난다. 빛나는 손잡이에 밥주걱의 둥근 날을 가진 넉넉한 호미, 땅을 파는 일보다 아버지가 파 놓은 흙을 다시 훑어보는 돋보기 알 같은 눈 밝은 호미, 나란히 서 있는 아내와 내 호미는 주말이나 가끔 들고 나가는 장식용 백과사전, 철물점 쇳내도 가시지 않은 두 자루 쇳덩어리, 제대로 땅 한 번 파지 못하고 마늘이나 고구마 살점만 물어뜯는 날선 칼날, 그 옆에 장난처럼 걸려 있는 아이들의 호미가 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 밭에 나가실 때 말동무로 따라 나서는 동화책같이 착한 호미가 한집에 산다.
-조성식 시인의 시 '가족' 전문
이 시는 2008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도서' 와 '호미' 라는 전혀 다른 소재를 이용하여 가족 구성원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재밌게 썼다. 읽다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고 마음이 저절로 흐뭇해짐을 느끼게 된다. 농부에게 호미는 책과 같을 것이다. 그것을 통하여 삶을 영위해가고 세상의 이치도 깨닫게 된다.
시에는 사물(호미)과 공간(헛간)의 이미지를 통해서 삼대 가족들(농사 짓는 부모님, 맞벌이 부부와 자녀들) 의 감정이나 느낌, 내면심리 등을 잘 관찰하여 세대의 차이와 존재의 쓰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아버지 호미는 나가면 며칠씩 밤새고 들어오는 가장 많이 일하는 존재이고 어머니 호미는 삶의 고단함을 감싸는 넉넉한 존재이다. 나와 아내는 장식용 백과사전과 같고 아이들은 동화책 같이 착한 호미이다. 모두가 그들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 나름 하나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존재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요즘은 다양한 형태로 가족이 존재한다. 모두 나름 사정이 있고 여러가지 이유로 각자의 서사를 품고 살아간다. 그것은 다름이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냥 곁에 있어야 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서로 각자의 역할을 이해하고 배려한다면 관계의 유대감과 함께 따스함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어향숙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김유정 신인문학상'(2016)을 받았다. 시집으로 《낯선 위로가 눈물을 닦아주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