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가면
가는 곳마다 거기서
나는 사라졌느니,
얼마나 많은 나는
여행지에서 사라졌느냐.
거기
풍경의 마약
집들과 골목의 마약
다른 하늘의 마약,
그 낯선 시간과 공간
그 모든 처음의 마약에 취해
나는 사라졌느냐.
얼마나 많은 나는
그 첫사랑 속으로
사라졌느냐.
-정현종 시인의 시 '여행의 마약' 전문
이 시는 정현종 시인의 시집 《그림자에 불타다》 에 실려 있다.
여행을 해본 사람은 공감할 것이다. 새로운 풍경은 첫사랑처럼 설레인다는 것을, 그 낯선 시간과 공간의 "처음"에 취해 "얼마나 많은 나"를 그곳에 두고 와야 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시인은 그 느낌을 "마약"에 취했다고 실감나게 표현했다. 여기서 "마약"은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매개체일 것이다. 기존의 고정된 "나"에서 해방되어 좀더 유연하고 열린 "나"로 나아가게 만든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프라하 출신의 오스트리아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평생 집 없이 유럽 여러 나라를 떠돌며 그 생생한 느낌을 시로 썼다고 한다. 가끔 낯선 풍경 안에서 스스로 걸어 잠그고 고독 속으로 들어가 그 감각을 만끽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것은 시공간을 가로질러 무한히 긴 시대를 이야기해 주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안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좁고 긴 골목 끝에서 "사라지는" 순간이 때때로 진정으로 "존재"하는 순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 주부터 많은 사람이 더위를 피해 휴가를 떠난다고 한다. 아름다운 우리나라 곳곳으로, 해외로 향할 것이다. 모두 새로운 풍경을 보며 힘들었던 모든 것을 비우고, 시처럼 수많은 "나"가 사라지는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 때때로 망각이 진정한 치유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예전과 조금은 다른 현실을 맞이하길 바란다.
어향숙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김유정 신인문학상'(2016)을 받았다. 시집으로 《낯선 위로가 눈물을 닦아주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