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바람의 아이
  • 어향숙 시인
  • 등록 2025-08-03 06:36:58
  • 수정 2025-08-04 07:04:26

기사수정


태풍이 또

내 깊숙한 곳을 뒤집어놓았다

집을 나가야겠다

돌아온 지 한 달

누구의 것이든 상관없다 돈을 챙겨야 한다

또다시 돌아오겠지

그러나 귀가는 아니다

그곳으로부터 이곳으로 흘러오는 것뿐


엄마는 본디 바람이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소식도 없이 내 앞에 서 있곤 했다

엄마가 넣어준 바람이 내 혈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지

구멍이 숭숭 뚫린 몸속에서부터

발밑 허공,그 너머까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내 몸뚱이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어


곧 떼어내야 할 껌딱지나 작은 때 같아

빨리 사라져야 할 의무, 그 절박함이라니

그래서 나는 자꾸 

사라진다

바람처럼

엄마처럼


-정유경 시인의 시 '바람의 아이' 전문



정유경 시인의 시집 《연하리를 닮다》 에  실린 시다.


아이는 엄마가 자신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시기가 있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라캉은 이 시기를 "거울 단계"라고 했다. 보통 태어난 지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를 말한다. 이 시기를 잘 지나야 엄마와 분리가 이루어지고 상징계로 진입하여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화자에게 "엄마"는 어릴 때부터 부재의 상징인 동시에 결핍의 원천인 욕망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자꾸 엄마의 부재를 모방하고 동일시하려고 한다. "본디 바람"인 엄마는 가끔 태풍이 되어 화자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뒤집어 놓기도 하고 혈관 구석구석 돌아다니다가 발 밑 허공, 그 너머까지도 가게 만든다. 바람처럼, 엄마처럼 몸뚱이를 어디에 둘지 몰라 툭하면 사라진다. 세계와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자신의 몸조차도 낯설 때가 많다.


부모의 결핍이 고스란히 아이의 고통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시다. 엄마의 부재처럼 마음의 상처는 사라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그 결핍을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다면, 들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아마도 아이는 존재를 인정받고 "나"는 "나"로 자리를 회복해 가지 않을까 싶다. 


이 시를 쓴 정유경 시인은 사십 년째 영월 연하리에서 돌봄운영체를 운영하며 기꺼이 그런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주었다. 정작 본인은 결혼을 안 했지만 결혼 시켜 찾아오는 자식은 많다. 그래서 행복하다는 분이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결핍은 존재한다. 그것은 지워야 할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이겨나가야 할 삶의 필요조건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덧붙이는 글

어향숙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김유정 신인문학상'(2016)을 받았다. 시집으로 《낯선 위로가 눈물을 닦아주네》가 있다.

관련기사
TAG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포토/영상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최신뉴스더보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이슈픽] 강선우 의원 '보좌관 갑질' 논란···야당 "사퇴해야" vs 여당 "충실히 소명" 강선우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보좌관 갑질' 논란의 중심에 섰다. 문제를 제기한 보좌진들은 "자택 쓰레기 분리수거, 변기 수리 등 사적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어 "5년간 46명이 의원실을 떠났다"며 이례적인 인사 교체가 갑질의 방증이라는 목소리도 높다."변기 수리·쓰레기 분리수거까지"…...
  2. [이슈픽] '외국인 부동산 투기 방지법'···이언주의 허가제 vs 주진우의 신고제 외국인 부동산 투기가 이슈로 떠오르면서 여야 의원들이 잇따라 관련 법안을 발의했다. 특히 중국인의 국내 주택 소유 비율이 절반을 넘어서면서 규제 강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이언주·주진우 의원, 외국인 부동산 투기 방지법 경쟁 발의7월 9일 이언주 민주당 의원이 '외국인 부동산 투기 방지법'을 발의했다. 법안의 핵심은 ...
  3.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가족 집에 들어서면 대문 옆에 헛간이 서고처럼 서 있는데 처마 끝에 도서 대여목록 카드처럼 여섯 자루의 호미가 꽂혀 있다. 아버지 호미는 장시간 반납하지 않은 책처럼 한번 들고 나가면 며칠씩 밤새고 돌아온다. 산비탈을 다듬는지 자갈밭을 일구는지 듬성듬성 이가 빠져 자루만 조금 길면 삽에 가까운 호미, 그 옆에 어머니 호미는 가장 많...
  4.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바이킹 선장은 낡은 군복을 입고 담배를 문 채로그냥 대충 타면 된다고 했다두려운 게 없으면 함부로 대한다망해가는 유원지는 이제 될 대로 되라고배를 하늘 끝까지 밀어 올렸다모터 소리와 함께 턱이 산에 걸렸다쏠린 피가 뒤통수로 터져 나올 것 같았다원래는 저기 저쪽 해 좀 보라고 여유 있는 척좋아한다고 외치려 했는데으어어억 하는 사이 .
  5. [이슈픽] 국무회의 첫 생중계에 쏠린 시선···"투명성 강화" vs "긍적적 평가할 뻔" "국민이 정책 논의 과정을 볼 권리가 있다."2025년 7월 29일, 이재명 대통령이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국무회의 전 과정을 국민 앞에 생중계했다. 대통령의 모두발언만 공개되던 관행을 깨고, 1시간 20분 동안 주요 현안에 대한 장관들과의 실시간 토론까지 국민에게 여과 없이 공개했다.정치권의 엇갈린 반응: "투명성 강화" vs...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