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를 베어낸 마당으로 바닷바람이 그대로 들어와 마당의 잡풀과 뒤엉켰다. 마당을 할퀴는 바람은 여자의 긴 머리카락을 떠올리게 했다. 비바람이 방문을 후려치고 번개가 파도를 가르는 날이면 소요 곁으로 바싹 다가가 누웠다. 무서워, 무서운 것을 보았어, 나 혼자 두지 마, 가지 마. 소요의 몸을 꼭 껴안고 소요의 입에서 나오는 더운 입김이 이마에 닿아 이마가 젖어야 잠이 들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소요는 공판장의 금고에서 돈을 빼냈고, 배에서 엔진을 떼어내 도시로 들고 나가 헐값에 팔았다. 소요의 짓이란 것을 알고 노여움이 치받친 섬주민들이 몰려왔다. 그래서 소요는 섬에서 쫓겨났다.
무엇을 보았니, 무서운 것을 보았어요, 그건 꿈이란다, 어서 꿈에서 빠져나오렴, 실제보다 더 실제 같아요, 저기 무리에서 벗어나 천천히 날아가는 새가 보이니, 저기 뒤처진 새가 나쁜 꿈을 물고 날아갈 거야, 새에게 말해버려, 그리고 잊어라, 아니요, 어떤 것은 잊혀지지 않아요, 잊지 않도록 오래 기억해야 해요, 여자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어요, 바다를 향해 앉아있었으니깐, 네 명의 섬 여자들이 여자 곁으로 다가갔어요, 한 명이 여자의 어깨를 밀쳤어요, 여자는 바람에 날리듯 옆으로 쓰러졌어요, 섬 여자들이 여자를 둘러싸고 머리칼을 휘감아 잡아당겼어요, 여자가 결심한 듯 일어나 섬 여자들을 뿌리치고 바다를 향해 걸어갔어요, 섬 여자들은 팔짱을 낀 채 여자를 바라보았어요, 휘청거리던 여자는 몇 걸음 걷지 못하고 구덩이에 빠지듯 바다에 확 삼켜졌어요, 여자의 가늘고 하얀 팔이 파닥거리며 파도 위 공기를 움켜잡고 할퀴어도 섬 여자들은 팔짱을 풀지 않은 채 잔잔한 바다를 바라보듯 서 있었어요, 일렁거리던 바다 표면이 잠잠해질 때까지 여자들의 단단한 등은 움직이지 않았어요.
보트를 타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지나쳐 선착장으로 갔다. 보트 관리실장은 내 인사를 받으며 서두르라고만 말했다. 카운터에 앉은 여직원이 락커 실 열쇠를 주며 소요가 핸드폰을 안 받는다며 소요와 연락을 하는지 물었다. 나는 모른다는 표정을 짓고 애매하게 웃었다. 전날의 사고에 대해 아무도 말이 없었다. 옷을 갈아입고 안전요원 마크가 찍힌 구명조끼를 입고 모자를 썼다. 높은 빌딩의 그림자 숲에 파묻혀 있는 토끼 숲의 소나무 아래에 섰다. 소나무에 등을 기대려다 나무의 표면을 만졌다. 나무의 껍질에 소금이 하얗게 말라붙어 있었다. 소금을 긁어내 입에 댔다. 짠맛이 났다. 소나무의 뿌리가 아무리 깊어도 바다에 닿지는 못할 거였다. 그래도 뿌리가 다져놓은 흙과 모래를 파고들어 바다에 가 닿았을지도 몰랐다. 나무에 등을 기대고 몇 층인지 헤아릴 수 없는 빌딩들을 올려다보았다. 이 도시 전체는 모래에 파묻은 소요의 오르골을 떠오르게 했다. 선착장을 출발한 인디언 카누와 아메리칸 카누가 맞닿을 듯 가까워졌다가 아슬아슬하게 피해 갔다. 돌고래 상 근처에 있던 안전요원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는 핸드폰 폴더를 펼쳤다. 소요 연락처 좀 알려줘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 직원들 대부분 소요한테 돈을 빌려줬다던데, 그쪽도 그래요? 네. 나는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미간을 잔뜩 좁히고 목뒤 살갗을 긁다가 돌고래 상 쪽으로 갔다. 소나무에 등을 기대 물을 쏘아보았다. 저 물은 바닷물인가, 강물인가. 내가 서 있는 곳은 바다인가, 도시인가. 안전한가, 이곳은. 소나무에서 등을 뗐다. 붉은 꽃이 그려진 양산을 사야겠다. 섬으로 돌아가 목선을 바다에 띄우고 양산을 펼칠 것이다. 목선에 펼쳐놓은 양산은 바다에서 선명하게 눈에 띌 것이다. 나는 물때와 상관없이 바다에 나갈 것이다. 모든 섬 주민이 바라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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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윤 소설가
박정윤 소설가는 강원도 강릉 출생이며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에 《강원일보》 신춘문예, 「바다의 벽」으로 당선된 뒤 2005년에 「길은 생선 내장처럼 구불거린다」로 《작가세계》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프린세스 바리』로 제2회 혼불문학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프린세스 바리』, 『목공소녀』, 『연애독본』, 『나혜석 , 운명의 캉캉』, 『꿈해몽사전』 등이있다.
[아이즈앨범] 길고 긴 터널의 끝
길고 긴 겨울의 북풍 한설 끝에 봄이, 아주 벅찬 그리하여 완전한 봄이 왔습니다. 너무나 간절하게 간절하게 기다리고 기다리며 애태우던 절망의 그 절망이 사라지고 매화, 그 희망의 봄이 왔습니다.
'아이즈 앨범' 1999년 어느 겨울 새벽
아주 추운 어느 새벽 나의 밤의 미행은 계속되었고 갑자기 친구가 나타났다 외투를 벗어주고 싶었지만 야박하게도 렌즈 노출이 3분을 넘어가고 있었다.파르르 떠는 몸의 파동과 온기를 나눌 연민의 차이처럼 찰라가 만든 결과 뒤 밀려드는 타자들의 고통이 어두웠다. 오늘처럼 쇄골이 시리면 생각나는 그 겨울 그 시간... *2001년 사진전, ...
얼어 붙은 땅에 노란 납매 그리고 동백
꽁꽁 얼어 붙은 날씨였으면 더 신기하고 감격으로 채워졌을 텐데...대한민국이 얼어붙고 혼란스러운 계절납매와 동백이가 핀 1월 따뜻한 봄을 기다려 본다
[아이즈앨범] 첫눈이 말하는 폭설 이야기
큰눈이 내려주었다차는 차대로 엉거주춤사람은 사람대로 조심조심건물들도 내리는 눈에 모서리를 잃어간다모두가 흐려지는 날인데눈 녹은 자리에 다시 큰눈 내리고내리는 만큼 길이 질퍽해져도입가에 번지는 웃음이 있다첫눈이 많이 왔다는 말과 첫눈이 빨리 왔다는 말이 있다오늘 몇 시에 나왔냐는 물음과 퇴근길은 괜찮겠냐는 물음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