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박정윤 소설가의 유리정원' [연재소설[ 기차가 지나간다 3회
  • 박정윤 소설가
  • 등록 2024-11-23 00:00:02
  • 수정 2024-11-23 14:13:24

기사수정
  • - 기차가 지나간다 3회

박정윤 소설가


할머니 집으로 가기 전, 일학년 때였다. 나는 엄마가 새로 사준 멜빵 청바지를 입고 학교에 갔다. 첫 시간에 시험을 보았는데 산수 문제를 다 풀고 손을 들어 화장실에 간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받아쓰기가 끝나면 가라고 했다. 받아쓰기가 끝나고 옥외 화장실로 달려갔다. 빡빡한 멜빵 버클은 잘 풀리지 않았다. 간신히 버클을 끌러냈을 때, 바짓가랑이 사이로 오줌이 흘러내렸다. 나는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았다. 화장실에 확 빠져 죽고 싶었다. 종이 울렸지만 꼼짝하지 않았다. 짝이 화장실로 찾아왔다. 


"선생님이 오래."

 

나는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그고 싫다고 대답했다. 짝은 교실로 들어갔다가 다시 왔다. 


"선생님이 교실에 왔다가 집에 가래."


나는 대답하지 않고 기침만 했다. 짝은 교실과 화장실을 두 번 더 오갔다. 결국, 짝이 책가방을 화장실로 가져다주었다. 짝 아이의 발짝 소리가 멀어졌을 때 문 밖에 있는 가방으로 엉덩이를 가리고 뛰었다. 엄마에게 야단맞을 생각에 앞이 아찔했다. 비가 오길 바랐지만 햇볕이 쨍쨍했다. 나는 시장으로 갔다. 시장 초입에 있는 얼음 공장 앞에는 늘 물웅덩이가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린 후, 넘어지는 척 물웅덩이에 앉았다. 일어설 때, 방울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아카브 구씨가 얼음을 실은 리어카를 끌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니가 일곱째나, 라고 물어보았다. 리어카 위의 커다란 얼음 표면으로 햇빛이 미끄러졌다. 얼음도 땀으로 반질거렸다. 그는 흰 러닝을 배 위까지 걷어 올리고 목에 두른 수건으로 연신 얼굴을 닦았다. 그가 리어카를 옆으로 틀자 방울 소리가 났다. 나는 사람들 사이를 헤쳐 나가는 그의 뒤를 리어카요, 소리치며 졸졸 따라 다녔다. 그는 가게마다 얼음을 하나씩 배달해주고 리어카가 텅 비자 나를 돌아다보았다. 


"리어카 탈래?" 


나는 물이 잘박한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양 손으로 리어카를 잡았다. 아카브 구씨의 검은 어깨에는 땀이 말라 있었다. 그의 몸을 지나쳐 천천히 내 얼굴에 닿는 바람에서 소금냄새가 났다. 바람과 경쾌한 방울소리와 함께 대번에 그가 좋아졌다. 


철로에서 내려와 철로 위에 귀를 대어 보았다. 서서히 귀를 간질이던 진동이 가슴을 쿵쿵 후려쳤다. 멀리서 기차가 다가왔다. 나는 얼른 철길을 따라 관사 쪽으로 뛰어갔다. 담벼락에 등을 기댔다.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진아 언니는 아카브 구씨 아들이었던 흑인 아이가 기차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아이의 사지가 찢겨졌다 했다. 그 사건으로 여자의 뱃속에 있던 아이는 죽었고 늘 술만 찾던 구총각도 역무원 일을 관두고 관사를 떠났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달려오는 기차에 뛰어들어 사지가 찢긴 흑인 아이를 생각했다. 

아이는 철로 앞에 서 있다. 기차 바퀴가 선로를 꽉 조이며 다가온다. 아이가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는다. 철걱철걱 소리를 내며 달려온 기차의 첫 바퀴가 아이의 몸을 꿈틀 짓누른다. 이어 여러 개의 바퀴가 아이의 몸을 휙휙 지나간다. 순식간에 기차의 바퀴에 의해 사지가 찢겨지고 으깨진다. 


"여기서 뭐해, 청소하고 엄마 일 좀 돕지."

 

엄마가 담 안쪽에서 얼굴을 내밀곤 냅다 소리를 질렀다. 나는 무릎에 힘이 빠져 담 아래에 털썩 주저앉았다.


모자사생대회는 남대천변에서 이루어졌다. 나는 도장 찍힌 도화지를 받아 양궁장이 보이는 곳에 앉았다. 대부분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이거나 미술 학원 선생님이랑 같이 있었다. 오늘은 엄마와 약속한 수요일이었다. 저녁 6시까진 여자를 데리고 할머니 집으로 가야 했다. 

연필로 도화지를 삼등분 해 가로로 두 줄 그었다. 아랫부분에 흐르는 물결을 그렸다. 물 위에 돌이 쌓인 제방, 그 위에 풀이 돋아난 둑과 지붕만 보이는 기와집을 스케치했다.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어 지우개로 지웠다. 도화지에 보풀이 일어나고 지저분했다. 나는 가방 안에서 24가지 색이 플라스틱 튜브에 들어있는 몽블랑 물감을 꺼냈다. 대학생인 진아 언니가 과외를 해서 번 돈으로 사준 선물이었다. 물감의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흰 액체가 올라와 있는 노랑 물감에서 역한 냄새가 났다. 튜브의 끝을 살짝 눌렀다. 흰 액체가 조금 나오다 이내 쿨럭거리며 노랑 물감이 나왔다. 무언가 가슴 속에서 노랑 물감 같은 말랑말랑하고 간질간질한 어떤 것이 흘러넘치는 것 같았다. 나는 엄지에 묻은 노랑 물감을 조심스럽게 손으로 비벼 문지르고 다시 튜브의 뚜껑을 닫아 가방 안에 넣었다. 가방 속, 검은 비닐봉지 안에 뒤섞여 있는 크레파스 중 가장 길게 남은 다홍색을 꺼냈다. 다홍색 크레파스로 활을 쏘는 남자와 과녁을 스케치했다. 활을 겨냥하는 남자의 얼굴과 굵은 팔뚝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하늘을 색칠하기에 마땅한 색이 없었다. 하늘색과 파란색 모두 없었다. 턱을 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닐봉지 안에서 크레파스를 꺼내 하나씩 비교해 보았다. 약간 흐린 하늘은 회색이었다. 회색 크레파스를 들고 하늘을 색칠했다. 너무 똑같이 잘 그려 내가 상을 받으면 어쩌나, 생각하며 선생님께 가져갔다. 선생님은 다홍색 크레파스로 스케치하면 안 되고 회색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왜 안 되나요?"


선생님은 나를 쏘아보곤 그림을 종이 박스 안에 담았다. 나는 회색을 사용하면 왜 안 되는지 정말로 궁금했다.


"왜 회색을 쓰면 안 되나요?"


다시 물어봤지만 선생님은 대답을 안 해주었다.


포교당 옆 파란 대문 집에 갔다. 청년은 신경질을 내며 문을 닫았다. 나는 포교당 마루에 앉아 청년이 혼자 노는 것을 바라보았다. 청년은 평상에 앉아 기타를 쳤다. 기타를 치던 청년이 일어났다. 목발을 짚고 그림자를 질척질척 흔들며 현관으로 들어갔다. 나는 가방 안에서 공책을 꺼내 뒷장에 남자 인형을 그렸다. 사선으로 벌린 팔의 겨드랑이 사이에 목발을 그려 넣었다. 

현관에서 나온 청년이 평상에 앉았다. 그는 신문지를 펼치곤 마른 오징어를 허공에 대고 흔들다 쫙쫙 찢었다. 오징어의 몸통을 햇빛에 비춰보는 척 나를 향해 들어올렸다. 오징어를 허공에 들어 올린 채 살을 조금씩 찢어 먹었다. 몸통 조각이 작아질 때마다 청년의 하얀 얼굴이 점점 많이 보였다. 이내, 청년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청년은 입을 실룩이며 웃어 보였다. 오징어 귀 부분과 꼬들꼬들한 다리 끝부분까지 남김없이 먹었다. 껍질을 벗겨 놓았던 것도 질겅거리며 씹었다. 마침내 내 입에서 침이 흘러내렸다. 

가방 위에 얼굴을 묻고 꼬꾸라져 잠든 나를 누군가 깨웠다. 보살은 나를 부엌으로 데리고 가 비빔밥을 주며 왜 거기 있냐고 물었다. 나는 사생활이라 얘기할 수 없다는 말만 하고 쓴 나물을 골라내고 비빔밥을 먹었다. 

댓돌을 오르며 옆집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알머리의 청년이 감나무 밑에 바싹 다가서서 이쪽을 건너보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손으로 주먹을 먹이는 흉내를 내곤 절룩거리며 평상으로 가 앉았다. 청년은 기타를 치다가도 이따금 내가 앉은 곳을 쳐다보았다. 내가 나무 기둥 뒤에 숨으면 청년은 평상에서 일어나 담 가까이까지 와서 이쪽을 살폈다. 청년의 알머리가 어슴푸레하게 보일 때까지 여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파란대문집의 초인종을 누르고 다음 주 수요일에 오겠다는 말을 하고 돌아섰다. 시장을 지나 할머니 집으로 갔다. 골목에는 대문 없는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집들은 문 열면 바로 부엌이고 방이었다. 어둑한 골목집 문들은 모두 닫혀 있고 작은 창으로 노란 불빛이 새어나왔다. 그중 어느 한 문을 열고 들어가 신발을 신은 채로 한숨 자고 싶었다. 그러면 엄마한테 그 집에 갔었다는 설명과 청년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엄마는 분명, 여자를 데려오지 않은 나 때문에 속상할 테고 추운 날씨에 냉수를 들이켤 것이 뻔했다.




- 다음주 토요일에 4회가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박정윤 소설가는 강원도 강릉 출생이며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에 《강원일보》 신춘문예, 「바다의 벽」으로 당선된 뒤 2005년에 「길은 생선 내장처럼 구불거린다」로 《작가세계》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프린세스 바리』로 제2회 혼불문학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프린세스 바리』, 『목공소녀』, 『연애독본』, 『나혜석 , 운명의 캉캉』, 『꿈해몽사전』 등이있다.

관련기사
TAG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포토/영상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최신뉴스더보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모과의 귀지를 파내다 모과에 핀 얼룩을 손으로 쓱쓱 문지르니점액질이 끈끈하게 배어 나온다얼굴에 핀 검버섯처럼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반짝거린다 모과의 귀에 면봉을 깊숙이 넣으니갈색의 가루가 묻어 나온다너는 그것이 벌레의 똥이라고 우기고나는 달빛을 밟던 고양이들의 발소리라 하고천둥소리에 놀라 날아들던 새의 날갯짓 소리라 하고새벽바람에 잔..
  2. [새책] 번아웃 겪는 2040세대를 위한 제안 《셀프 콤마》···하루 5분 '일상돌봄 코칭' 끝없는 경쟁과 정보 과잉 속에서 번아웃과 무기력을 호소하는 2040세대가 늘고 있다. '더 애써야만 살아남는다'는 압박감은 우리도 모르는 새에 소중한 자신을 갉아먹는다. 열심히 달려왔는데 왜 마음은 늘 허탈하고 공허한 것일까?새로운제안에서 15년 차 HRD(인적자원개발) 교육전문가 이종미의 첫 책 《셀프 콤마》를 펴냈다. 과부하...
  3. 11월 '코리아세일페스타' 가전 라이벌전···삼성 'AI·상생' vs LG '할인·구독' 정면승부 대한민국 최대 쇼핑 축제 '2025 코리아세일페스타'가 11월 1일 시작되는 가운데, 삼성전자와 LG전자가 10년 연속 행사에 참여하며 대대적인 할인 경쟁에 돌입한다. 삼성전자는 AI 가전 패키지와 소상공인 상생 혜택을 전면에 내세웠고, LG전자는 높은 할인율과 구독 서비스를 무기로 맞불을 놓으며 11월 소비자들의 지갑 공략에 나선다.삼성...
  4.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접히다 "지금 화장 중입니다"승화원 전광판에는 뜨거운 불길이 일고한곳에 모인 우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말이 없었다전광판이 바뀌고눈물이 마르기 전 냉각을 마친 어머니를 모시러 갔다육중한 철문이 열리고철제 침대가 끌려 나왔다붉은 장미로 채운 관과 황금빛 수의는 간 곳 없고주검을 눕힌 그 자리타다만 뼈 몇 개와 재만 놓여 있...
  5. [새책] 20대 청년이 쓴 《마르크스주의 입문》···세계 바꿀 가장 날카로운 무기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되는 지금, 왜 다시 마르크스주의를 읽어야 할까? 1%의 부자가 전 세계 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불평등이 지속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가 계속되면 마르크스주의는 다시 부활할까?오월의봄에서 20대 청년 이찬용이 쓴 《마르크스주의 입문》을 펴냈다. 그동안 나온 마르크스주의 책들은 대부분 오래됐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