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발을 씻으며
  • 어향숙 시인
  • 등록 2025-04-06 03:29:36
  • 수정 2025-04-09 21:03:47

기사수정


사람이 만든다는 제법 엄숙한 길을

언제부턴가 깊이 불신하게 되었다

흐르는 물에 후끈거리는 발을 씻으며

엄지발톱에 낀 양말의 보풀까지 떼어내며

이 고단한 발이 길이었고

이렇게 발을 씻는 순간에 지워지는 것도

또한 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때로는 종달새 울음 같은 사랑을 위해

언젠가는 가슴에서 들끓는 대지를

험한 세상에 부려놓으려 길이,

되었다가 미처 그것을 놓지 못한 발

그러니까 씻겨내려가는 건 먼지나 땀이 아니라

세상에 여태 남겨진 나의 흔적들이다

지상에서 가장 큰 경외가

당신의 발을 씻겨주는 일이라는 건

두 발이 저지른 길을 대신 지워주는 의례여서 그렇다

사람이 만든 길을 지우지 못해

풀꽃도 짐승의 숨결도 사라져가고 있는데

산모퉁이도 으깨어져 신음하고 있는데

오늘도 오래 걸었으니 발을 씻자

흐르는 물에 길을, 씻자


- 황규관 시인의 시 '발을 씻으며' 전문



 이 시는 황규관 시인의 시집 《 패배는 나의 힘》 에 실려있다.


 그날 아침,은 안국역까지 향하는 모든 길이 막혀있었다. 전날 도저히 잠을 이룰수가 없어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최대한 가까이 갔고 몇 정거장 걸어서 안국동 네거리 북인사 마당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하여 꽉 메운 광장의 많은 사람들을 보고 안도했다. 함께 헌재의 결정문을 지켜봤다. 오후에는 출근하여 근무를 했고 저녁에는 흐르는 물에 고단한 발을 씻으며 당신의 발도 씻겨주지 못해 안타까웠다. 


 시처럼 "이 고단한 발이 길이었고 이렇게 발을 씻는 순간 지워지는 것도 또한 길이라는 걸" 깨달았다. 오래간만에 세상 일들 잊고 푹 잠들 수 있는 밤이었다.


 사람사는 세상은 늘 시행착오와 좌충우돌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모든 일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 손 치더라도 법치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법으로, 대화로 끝까지 풀어가려고 노력해야했다. '계엄' 이라는 거대한 권력 앞에서 국민들이 힘 없다고 더이상 순진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소통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절실히 깨닫게 된다.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드디어 '서울의 봄' 이 찾아왔다. 세상의 사물들이, 사람들이 끊임없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나직하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주변의 사물들에, 사람들의 목소리에 눈길을 주고 귀도 열어 함께 즐기는 봄날이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멋진 국민들과 함께라면 또 한 해 열심히 잘살아보고 싶은 요즘이다.

덧붙이는 글

어향숙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김유정 신인문학상'(2016)을 받았다. 시집으로 《낯선 위로가 눈물을 닦아주네》가 있다.

관련기사
TAG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포토/영상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최신뉴스더보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이슈픽] 강선우 의원 '보좌관 갑질' 논란···야당 "사퇴해야" vs 여당 "충실히 소명" 강선우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보좌관 갑질' 논란의 중심에 섰다. 문제를 제기한 보좌진들은 "자택 쓰레기 분리수거, 변기 수리 등 사적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어 "5년간 46명이 의원실을 떠났다"며 이례적인 인사 교체가 갑질의 방증이라는 목소리도 높다."변기 수리·쓰레기 분리수거까지"…...
  2. [이슈픽] '외국인 부동산 투기 방지법'···이언주의 허가제 vs 주진우의 신고제 외국인 부동산 투기가 이슈로 떠오르면서 여야 의원들이 잇따라 관련 법안을 발의했다. 특히 중국인의 국내 주택 소유 비율이 절반을 넘어서면서 규제 강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이언주·주진우 의원, 외국인 부동산 투기 방지법 경쟁 발의7월 9일 이언주 민주당 의원이 '외국인 부동산 투기 방지법'을 발의했다. 법안의 핵심은 ...
  3.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가족 집에 들어서면 대문 옆에 헛간이 서고처럼 서 있는데 처마 끝에 도서 대여목록 카드처럼 여섯 자루의 호미가 꽂혀 있다. 아버지 호미는 장시간 반납하지 않은 책처럼 한번 들고 나가면 며칠씩 밤새고 돌아온다. 산비탈을 다듬는지 자갈밭을 일구는지 듬성듬성 이가 빠져 자루만 조금 길면 삽에 가까운 호미, 그 옆에 어머니 호미는 가장 많...
  4.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바이킹 선장은 낡은 군복을 입고 담배를 문 채로그냥 대충 타면 된다고 했다두려운 게 없으면 함부로 대한다망해가는 유원지는 이제 될 대로 되라고배를 하늘 끝까지 밀어 올렸다모터 소리와 함께 턱이 산에 걸렸다쏠린 피가 뒤통수로 터져 나올 것 같았다원래는 저기 저쪽 해 좀 보라고 여유 있는 척좋아한다고 외치려 했는데으어어억 하는 사이 .
  5. [이슈픽] 국무회의 첫 생중계에 쏠린 시선···"투명성 강화" vs "긍적적 평가할 뻔" "국민이 정책 논의 과정을 볼 권리가 있다."2025년 7월 29일, 이재명 대통령이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국무회의 전 과정을 국민 앞에 생중계했다. 대통령의 모두발언만 공개되던 관행을 깨고, 1시간 20분 동안 주요 현안에 대한 장관들과의 실시간 토론까지 국민에게 여과 없이 공개했다.정치권의 엇갈린 반응: "투명성 강화" vs...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