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을 팔았는데
어둠의 몸속에 들어와 있었다
쏟아지는 세상을 피하려
발을 더 디밀어 넣었는데
서랍들이 들어찬 지하 동굴이었다
곰팡이 슨 역사 뭉치와 오래된 자유와 시든 신념
반 열린 추억이 들끓는
시詩 창고에 갇혀버렸다
영영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이며 읽고 던지고, 쓰고 던지고,
홀로 던지고, 슬프고 던지고, 쓸쓸한 지경
던지고, 적막을 던지고, 다시 읽고
던지고, 다시 쓰고 던지고
그리고,
외로웠다
평생 밖을 욕망했는데
아뿔싸, 나를 가둔 강박으로
단단한 무덤이 완성되었다.
-김명원 시인의 시 '수박' 전문
김명원 시인의 시집 《오르골 정원》 에 실려 있는 시다.
시에서 "수박"은 우리가 요즘 즐겨 먹는 과일과 붙잡아 묶는다는 "수박囚縛"으로 중첩되어 읽힌다. 그렇다면 "시詩"는 "씨"를 말하겠다. 겉에서 보면 보이지 않지만 그것은 창조적 잠재성을 나타낸다.
쏟아지는 세상을 피하려 발을 디민 곳이 "시詩창고", 지하동굴이다. 동굴은 외부와 분리된 폐쇄 공간이다. 자신만의 고독을 뜻하는 내면의 밀실이기도 하다. 평생 그곳을 빠져나와 광장으로 나가기를 욕망했지만 영영 그 "시詩창고"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읽고 쓰고 던지고 다시 쓰기를 반복한다. 속이 까맣게 될 때까지. 역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단단한 무덤이 완성될" 때까지. 물론 수박의 붉은 피가 다시 쓰게하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화자가 시에 대해 얼마나 욕망하는지, 얼마나 외롭게 싸워 왔는지, 또 앞으로 죽을 때까지 얼마나 치열하게 쓸 것인지 감히 느껴진다. 질문하는 힘이 너무 커서 그 자체가 에너지 되어 전율하며 읽게 된다.
어향숙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김유정 신인문학상'(2016)을 받았다. 시집으로 《낯선 위로가 눈물을 닦아주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