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커멓게 올라오는 미역을 보며 울고 있는 내 어깨를 누군가 짚었다. 학생, 괜찮아? 나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야상재킷 주머니에서 녹색 소주병을 꺼내 마셨다. 저도 한 모금 주세요. 거, 학생이 술 마셔도 되나? 학생 아니거든요, 휴학생이거든요. 남자는 머뭇거리다 녹색 병을 건네주었다. 나는 병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친구들과 경험삼아 마셨을 때와는 달리 시원하게 목을 타고 넘어갔다. 바다 앞이라서 그럴지도 몰랐다. 술병을 받아마시던 남자가 접은 무릎에 팔을 올리고 울었다. 파도 소리에 울음소리가 섞였다. 젖은 미역 냄새가 났다. 남자의 울음이 단단하게 굳어있던 내 울음을 풀어헤쳤다. 나는 남자와 한차례 울고 난 뒤 남자를 바라보았다. 왜 울어요? 남자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혹시, 이런 시 들어봤나?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는 마지막 연을 암송했다. I'll go back to heaven. At the end of my picnic to this beautiful world. I'll go back and say, It was beautiful. 우리 시를 영문으로 바꾸는 과제가 있었어요. 그때, 나는 picnic과 outing 중 어떤 단어를 선택할지를 고민했다. outing은 호모임을 밝히다, 는 뜻도 있어 나는 어감 상으로 밝은 느낌의 picnic을 선택했다. 그는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 전기고문을 당했어. 무연고자로 오해받아 서울 시립 정신병원에 수용되기도 했어, 지인들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해서 유고시집도 발표했어. 지옥 같은 삶을 살았던 그가 소풍 같은 세상이래, 아름다웠대. 그 시인이 오늘 죽었거든. 맙소사, 시인이 죽은 날이어서 울었단 말이에요? 그럼, 지난번엔 왜 울었어요? 시인 이상이 죽었거든. 신동엽, 박인환, 기형도가 죽은 날, 어찌 술을 안 마실 수 있겠어. 남자는 묻지도 않았는데 시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휴학생은 왜 울었어? 남자는 주머니에서 녹색 병을 하나 더 꺼냈다. 나는 그가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병을 뺏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남자 친구한테 차였어요. 남자는 내가 건네는 녹색 병을 받았다. 야, 병신 같은 놈아, 잘 살고 있냐. 나는 속으로 개 같은 년, 이라고 엄마를 욕했다. 욕해 봐요. 뭐? 욕해보라고요, 야, 병신 같은 시인아. 고작 뽕2 같은 영화 보다가 뇌졸중으로 죽었냐, 자, 해 봐요. 남자는 녹색 병을 들고 술만 마셨다. 나는 남자의 술병을 뺏었다. 야, 시발 놈들아 죽도록 가난뱅이처럼 살다가 왜 그렇게 일찍 죽었냐고. 남자는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크게, 크게, 욕해보라고, 병신처럼 욕도 못해요? 시팔, 좆같은 세상, 더러워서 못 살겠네. 욕이라기 보단 소리를 지르곤 남자는 울었다. 나도 울었다. 우리는 바다 앞에서 함께 울고, 술 마시고, 욕도 하는 사이가 되었다. 파도가 세차게 몰려왔다. 미역이 내 발밑까지 밀려올라왔다. 나는 몸을 구부려 미역을 집어 들고 울고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 미역 먹을 수 있는 거예요?”
아빠의 첫사랑인 촌스런 여자가 수줍은 듯 검은 색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여자는 식탁 겸 내 책상 앞 의자에 앉아 트레일러 안을 둘러보았다. 나는 비닐봉지를 펼쳤다. 운동복 스타일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입어봐. 봉지 안에 든 것은 손에 닿는 천의 촉감부터 사구려 티가 났다. 진분홍색 아디다스 트레이닝세트였다. 선호하는 메이커도 아니지만 짝퉁 티가 가장 많이 나는 것이 진분홍색이었다. 여자도 평소와 달리 꽃무늬가 프린트된 원피스에 분홍 스웨터를 걸쳐 입고 있었다. 속이 빤히 보였다. 아빠가 오는 날이었다. 여자는 수돗물을 틀어 손을 적셔보았다. 전기렌지의 불도 켜보았고 수납장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여자를 흘겨보곤 옷을 식탁 옆에 밀쳐놓고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이어폰을 귀에 꽂았지만 음악을 틀지는 않았다. 여자가 눈치껏 사라져주길 원했다. 여자는 화장실에 들어가 한참을 있었다. 행렬 문제를 푸는데 집중이 안됐다. 가로 안에 0과 1로 채워진 행렬은 눈이 두 개 달린 생선처럼 보였다. 여자가 뒤에서 부스럭거려 돌아보았더니 걸레로 바닥을 닦고 있었다. 피곤한 여자였다. 핸드폰으로 아빠가 등명락가사 앞을 지난다는 문자가 왔다. 아빠가 등명락가사 앞을 지났다네. 내 혼잣말에 여자가 호들갑을 떨며 쌀을 안쳐야 한다며 밖으로 나갔다. 나는 여자가 사온 옷을 검은 비닐봉지에 그대로 담았다. 침대 밑에 넣어둔 종이 상자에서 아베크롬비 진분홍 트레이닝 세트를 꺼내 입었다.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트레일러를 나갔다. 여자는 부엌에서 분주히 생선을 손질하고 있었다. 맨손으로 생선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뽑아내던 여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이 진분홍 트레이닝복을 유심히 봐, 이게 진짜야.’ 나는 검은 비닐봉지를 여자의 부엌 문고리에 걸어두고 나왔다. 바다에서 바람이 휙 몰아쳤다. 바람에서 소금냄새와 물미역 냄새가 났다. 나는 바다를 곁눈질하며 손님이 없는 횟집, 덜 마른 생선을 매달아 놓은 건어물집, 대문 틀만 있고 대문은 없는 집들을 지나쳐 파도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간판만 편의점이었다. 가게 안은 파도가 들어와 휩쓸고 빠져나간 것처럼 눅눅했고 갖춰놓은 물건도 별로 없었다. 안쪽에 손바닥만 한 방에서 책을 들여다보던 남자는 내가 가나 초콜릿을 내밀고 지폐를 주자 고개도 들지 않고 돈을 거슬러주었다. 나는 파도 편의점에서 나와 곧장 바다로 갔다. 바다와 간격을 유지하며 모래사장을 걸었다. 초콜릿의 금박 껍질을 벗기니 초콜릿이 편평했다. 칸칸을 허물고 녹았다가 다시 굳은 거였다. 초콜릿을 입에 넣었을 때,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남은 초콜릿을 툭툭 잘라 한꺼번에 입에 넣었다. 초콜릿이 쓴 것은 유효기간이 지났기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유효기간을 확인하려고 껍질을 펼쳤을 때, 주위가 어두워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빠에게 문자가 왔다. 핸드폰 전원을 껐다. 모래사장을 걸을 때마다 의문이 생겼다. 삼면이 바다이니깐 바다와 간격을 유지하며 모래사장을 계속 걸어가면 반대편 바다에 닿을 수 있을까. 지도처럼 바다는 정말 연결되었을까. 확인하지 않아도 신뢰할 수 있는 진리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 얼마만큼 확인해야 진리라고 신뢰할 수 있을까. 그림자와 어둠을 구분하기 힘들었을 때 모래사장이 급격히 좁아졌다. 어둠 속에 검은 바위가 솟아 올라있는 것이 흐릿한 달빛에 보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바다 위 하늘을 보았다. 날카로운 달이 떠있었다. 생선 아가미 같은 달이었다. 기름에 살짝 구운 가자미의 노란 살이 떠올랐다. 배가 고팠다. 나는 모래에서 발을 빼서 뾰족한 바위 위로 올라갔다. 뾰족한 바위들이 어둠 속에서도 수십 킬로미터 이어졌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뾰족한 바위들 틈에 앉았다. 편안했다. 어둠도, 파도 소리도.
-다음주에 이어집니다.
박정윤 소설가는 강원도 강릉 출생이며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에 《강원일보》 신춘문예, 「바다의 벽」으로 당선된 뒤 2005년에 「길은 생선 내장처럼 구불거린다」로 《작가세계》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프린세스 바리』로 제2회 혼불문학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프린세스 바리』, 『목공소녀』, 『연애독본』, 『나혜석 , 운명의 캉캉』, 『꿈해몽사전』 등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