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오래된 가을
  • 어향숙 시인
  • 등록 2025-09-07 07:55:44
  • 수정 2025-09-07 09:10:10

기사수정

돌아오지 않기 위해 혼자
떠나 본 적이 있는가

새벽 강에 나가 홀로
울어 본 적이 있는가

늦은 것이 있다고
후회해 본 적이 있는가

한 잎 낙엽같이
버림받은 기분에 젖은 적이 있는가

바람 속에 오래
서 있어 본 적이 있는가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이 있는가

증오보다 사랑이
조금 더 아프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
그런 날이 있는가

가을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것

보라,
추억을 통해 우리는 지나간다

 

-천양희 시인의 시 '오래된 가을' 전문

 


이 시는 천양희 시인의 시집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 있는가> 에 실려있다.


우리가 바라보는 '풍경'은 내면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더군다나 붉게 물든 가을에는 더욱더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게 된다. 단순히 감각적 현상을 넘어 내면과 마주하고 사유하게 되는 것이다. 시 속 가을은 아름다운 자연 뿐만 아니라 추억들이 간직되어 있는 계절이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자기 역사와 마주하는 시간이라 할 수 있겠다. 


앙리 베르그송의 '지속(durée)의 시간'처럼 직선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 현재의 감각, 미래의 예감이 한 흐름 안에서 '살아왔던 우리'를 발견하고 또 '지나갈 우리'를 목격하는 시간이다. 그런 시간을 통해 지나온 삶을 되돌아 보고 내면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래서 곧 다가오는 겨울을 견디게 하고 새롭게 봄을 맞이하게 할 것이다. 


이번 가을에는 어디론가 혼자 떠나 보고, 새벽 강에도 나가 보고, 혹 늦은 것이 없는가 둘러 보기도 하면서 한 잎 낙엽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싶다. 벌써 "오래된 가을"이 곁에 와 머무는 것 같다.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 느껴지는 시다.



덧붙이는 글

어향숙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김유정 신인문학상'(2016)을 받았다. 시집으로 《낯선 위로가 눈물을 닦아주네》가 있다.

관련기사
TAG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포토/영상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최신뉴스더보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모과의 귀지를 파내다 모과에 핀 얼룩을 손으로 쓱쓱 문지르니점액질이 끈끈하게 배어 나온다얼굴에 핀 검버섯처럼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반짝거린다 모과의 귀에 면봉을 깊숙이 넣으니갈색의 가루가 묻어 나온다너는 그것이 벌레의 똥이라고 우기고나는 달빛을 밟던 고양이들의 발소리라 하고천둥소리에 놀라 날아들던 새의 날갯짓 소리라 하고새벽바람에 잔..
  2. [새책] 번아웃 겪는 2040세대를 위한 제안 《셀프 콤마》···하루 5분 '일상돌봄 코칭' 끝없는 경쟁과 정보 과잉 속에서 번아웃과 무기력을 호소하는 2040세대가 늘고 있다. '더 애써야만 살아남는다'는 압박감은 우리도 모르는 새에 소중한 자신을 갉아먹는다. 열심히 달려왔는데 왜 마음은 늘 허탈하고 공허한 것일까?새로운제안에서 15년 차 HRD(인적자원개발) 교육전문가 이종미의 첫 책 《셀프 콤마》를 펴냈다. 과부하...
  3. 11월 '코리아세일페스타' 가전 라이벌전···삼성 'AI·상생' vs LG '할인·구독' 정면승부 대한민국 최대 쇼핑 축제 '2025 코리아세일페스타'가 11월 1일 시작되는 가운데, 삼성전자와 LG전자가 10년 연속 행사에 참여하며 대대적인 할인 경쟁에 돌입한다. 삼성전자는 AI 가전 패키지와 소상공인 상생 혜택을 전면에 내세웠고, LG전자는 높은 할인율과 구독 서비스를 무기로 맞불을 놓으며 11월 소비자들의 지갑 공략에 나선다.삼성...
  4.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접히다 "지금 화장 중입니다"승화원 전광판에는 뜨거운 불길이 일고한곳에 모인 우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말이 없었다전광판이 바뀌고눈물이 마르기 전 냉각을 마친 어머니를 모시러 갔다육중한 철문이 열리고철제 침대가 끌려 나왔다붉은 장미로 채운 관과 황금빛 수의는 간 곳 없고주검을 눕힌 그 자리타다만 뼈 몇 개와 재만 놓여 있...
  5. [새책] 20대 청년이 쓴 《마르크스주의 입문》···세계 바꿀 가장 날카로운 무기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되는 지금, 왜 다시 마르크스주의를 읽어야 할까? 1%의 부자가 전 세계 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불평등이 지속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가 계속되면 마르크스주의는 다시 부활할까?오월의봄에서 20대 청년 이찬용이 쓴 《마르크스주의 입문》을 펴냈다. 그동안 나온 마르크스주의 책들은 대부분 오래됐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