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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산문' 분실
  • 손병걸 시인
  • 등록 2024-11-17 00:00:01
  • 수정 2024-12-01 16: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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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밖에서 잃어버린 줄 알았던 체크카드가 집 안에서 발견되었다. 책상 위 책더미 사이에 있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곳이었다. 어젯밤은 그랬다. 방바닥을 더듬고 침대를 살피고 옷장 속을 다 뒤져도 못 찾은 체크카드다. 아무리 생각해도 행적을 알 수 없었다. 체크카드를 찾은 순간, 황당하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고 자괴감마저 들었다.  그래서일까? 헛수고한 시간에 대한 억울함이 밀려왔다. 그러나 정작, 당혹스러운 일은 따로 있었다. 너무 성급히 분실신고했다. 기실. 억울하면 체크카드가 훨씬 억울할 일이다. 나는 쓰던 원고를 멈추고 정지 당한 체크카드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생각했다. 빨리 은행에 전화부터 걸자. 그런데 다급하면 일이 더 안 풀리는가? 은행 콜센타 통화대기 음악이 한참 들리다가 끊어졌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또 통화대기 음악이 끊어졌다가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호흡이 가빠질 때쯤 통화가 연결되었다.


"정지를 풀어 주세요." 


나는 다시 찾은 체크카드를 말했다. 그러나 정지를 풀려면 직접 방문을 해야 한다고 했다. 별다른 수가 없었다. 원고는 은행을 다녀온 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있을 때였다. 체크카드가 내가 겪은 체험들과 겹쳐지며 지난 일들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24년 전이었다. 느닷없이 두 눈을 잃었다. 나는 분명히 살아 있었다. 그러나 어제 정지 당한 체크카드처럼 나는 정지 당했다. 두 눈을 잃자 사회는 내 생활을 서둘러 정지시켰다. 정지된 그 핑계로 나는 나를 더 적극적으로 격리했다. 속전속결이던 내 일상의 정지 뒤 절망의 무게가 삶을 짓눌렀다. 세상은 두꺼운 벽을 쳤고 좀처럼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입실과 퇴실이 자유롭던 내 집에서 내 몸은 자유를 잃었다. 편안해야 할 집이 감옥이 되었다. 나는 수인 아닌, 수인이 되었다. 성급한 정지는 하루아침에 내가 일궈온 모든 행적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살아온 이력에 대한 용도폐기였다. 속수무책이었다. 어제 체크카드도 내게 그 꼴을 당했다. 내가 밥을 먹고 택시를 타고 옷을 사고 딸아이 생일 선물을 사고 언제나 재빨리 내밀던 체크카드다. 비바람 눈보라 그 무더위 속에서도 체크카드의 살신성인은 대단했다. 나를 위해 온몸을 던져 결제했다. 세상 속으로 걸어갈 나를 위한 결제 횟수가 늘어날수록 체크카드는 상처가 늘었다. 그러나 어이없이 정지를 당했다. 오래전, 나처럼 체크카드도 멀쩡히 살아 있던 집에서 정지 당했다. 가장 즐겁고 편안히 쉴 곳이 무덤이 되었다. 한마디 말도 못 하고 당한 체크카드를 나는 과연, 살릴 수 있을까? 체크카드는 과연, 예전에 활기찬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직장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말이 있다. '집에 가서 쉬어'라는 말이다. 직장에서 쫓겨나는 것이 어찌 편안한 휴식이 되겠는가? 집이 편안한 집이 아니다. 감옥이다. 더 심하면, 무덤이 될 수 있다. 내가 신문사에 근무할 때였다. 두 눈이 점점 멀어져 가고 코앞에 있는 서류가 안 보일 때쯤이었다. 상사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몸도 안 좋아 보이고 업무도 원활치 않은데, 집에서 요양하는 것이 어떠냐는 설득이었다. 말이 좋아 설득이지, 집에 가서 쉬라는 사직 통보였다. 힘든 몸 편히 쉬라는데. 나는 오히려, 머리가 띵해 왔다. 네 살짜리 딸아이 얼굴이 떠올랐다. 가족과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날의 퇴근을 잊을 수 없다. 가장 편안한 집이었다. 그러나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집에 들어가면 못 나올 것 같았다. 예감은 적중했다. 여지없이 그 퇴근이 마지막 퇴근이 되었다. 다시는 그 직장에 출근할 수 없었다. 


나는 새로운 직장을 꿈꾸었다. 그러나 내게 단단한 벽이 생겼다. 사회에서 분리된 격리가 시작되었다. 집은 나날이 불편했다. 바늘방석을 깔고 누워 있는 것 같았다. 매 끼니는 소화불량에 걸릴 지경이었다. 스스로 감옥에서 벗어나려고 다시금 악착같이 다방면으로 일자리를 찾았다. 장애를 무릅쓰고 살아보겠다는데 반응이 이상했다. 적극적일수록 사회는 더 냉담했다. 감금이 길어질수록 내 삶의 의지는 수렁처럼 어두운 곳으로 더 어두운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때마다 자주 떠올렸다. 지상에서의 영원한 정지를 떠올렸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딸아이가 내 품에 안겨 왔다. 해맑은 몸짓으로 까르르 웃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딸아이를 안고 나는 생각했다. 나의 죄는 무엇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죄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명백히 집에 갇힌 장기수였다.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가까이 지내던 직장동료들과 지인들도 시차를 두고 멀어졌다. 물론, 내 사직 뒤 직장동료들이 내 복직을 위한 활동을 했다. 그러나 그들도 현실이 존재했다. 저마다 돌봐야 할 가족이 있었다. 회사와의 잦은 충돌을 버거워했다. 당연했다. 자신을 건사하기도 힘든 IMF 시절이었다. 그야말로 어렵고 힘든 시절 탓이었을까? 초창기에 도움을 주던 지인들도 하나둘 발길을 끊었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대단했다. 의지하던 사회보장제도도 복지부동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혼자 탈옥을 꿈꾸었다. 창살을 자르듯 재활을 시작했다. 캄캄한 길 끝에서 이정표를 찾듯 맨 처음 시각장애인복지관을 찾았다. 흰 지팡이를 짚고 걸음마를 익혔다. 툭하면 끊어지는 유도블록을 오래 밟았다. 턱에 걸리고 벽에 부딪히기를 거듭했다. 정강이가 깨지고 나뭇가지에 찔려 얼굴에 상처가 생기기도 했다. 깨진 구두코가 다시금 삶의 길을 열 때쯤, 손가락 끝은 짓무르기를 거듭했다. 점자를 읽기 위한 부단한 시간이 만든 상처였다. 상처가 아물어 갈 때쯤 분실된 내 삶이 복원되어 갔다. 서서히 어둠 속에서 환한 빛이 일어났다. 암담한 마음속에서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적극적인 생각도 강화되었다. 냉랭한 편견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내 감금이 풀린 건 자존감의 회복이었다. 버거울 때도 많았다. 그러나 얼마든지 나를 살아낼 나에 대한 사랑을 떠올렸다. 


특별한 일도 그 시기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 삶을 철저히 사랑하기로 했다. 밤마다 나를 사는 나를 기록했다. 기록이 쌓이고 그 기록이 새로운 기록을 요구했다. 문장의 구조와 표현이 불만스러웠고 매끄럽게 고쳐쓰기를 반복했다. 학창 시절 끼적이던 창작노트를 다시 펼친 격이었다. 그러다 보니 서서히 나를 넘어서려는 글쓰기가 나를 더욱 강력한 작가의 길로 떠밀었다. 학창시절 멈췄던 문학을 다시 만난 건 행운이었다. 쓰고 또 쓰다 보니 나는 어찌어찌 시인이 되었다. 자존감이 상승한 나는 문단 속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걸어 들어갔다. 반겨주는 사람들 때문에 나는 새로운 삶을 모색했다. 시인이 되었으니 이제 시를 살자. 내 삶이 시가 되자. 내가 시인지 시가 나인지 모를 삶을 살자. 그런, 긍정적인 문학을 살자. 마음과 행동이 편안해지자. 대단히 고마운 일이 생겼다. 초청시인 강연이었다. 


나는 이곳저곳에서 강연했다.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두 눈을 잃어버린 고통을 말했다. 사회가 나를 감금시킨 시절을 말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스스로 나를 정지한 고백이었다. 오랜 시간 집에서 탈출을 꾀하지 않은 고백이었다. 모든 말은 결국, 자학의 반성이었고 무기력증을 키운 후회였다. 아침 햇살은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커튼을 친 것이었다. 사회 탓만 했던 것이었다. 자포자기한 것이었다. 누워만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살아온 삶이 무시당한 것이 아니었다. 장애를 인정 못 한 분노에 그만 몸을 상하게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젯밤 체크카드가 내게 당했다. 용도폐기 당할 뻔했다. 체크카드를 다시 살리기 위해 신발끈을 단단히 묶어야 한다. 그래, 이제 완벽히 준비는 끝났다. 현관문을 열고 흰 지팡이를 편다. 경사진 골목길에 첫발을 내디딘다. 진눈깨비가 내린다. 찬바람이 귓불을 매섭게 가른다. 차디찬 칼날에 베인 허공의 상처는 보이지 않는다. 단말기에 숱한 긁힘을 당한 체크카드의 상처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함께 걸어온 숱한 이력도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발걸음은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묵묵히 우리의 길을 만들며 살아왔다. 송이눈에 덮여 보이지 않는 길처럼 잠시 안 보이는 삶도 있다. 겹겹이 쌓이고 쌓이는 송이눈 위에 다시 발자국을 찍을 일이다. 저 눈이 다 녹아 버려도 상관없다. 눈에 덮여 가려진 발자국도 눈길 위에 찍혀 있다가 사라진 발자국도 우리가 걸어 온 삶이다. 꼭 보이지 않아도 괜찮다. 나란히 걸어갈 우리 생의 궤적은 영원히 정지되지 않는다. 


덧붙이는 글

손병걸 시인은 2005년 부산일보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푸른 신호등』,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통증을 켜다』, 『나는 한 점의 궁극을 딛고 산다』가 있고 산문-『열 개의 눈동자를 가진 어둠의 감시자』, 『내 커피의 농도는 30도』가 있다. 수상은 『-구상솟대문학상』,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인국무총리상』, 『민들레문학상』, 『중봉조헌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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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 leesp20682024-11-30 08:01:38

    휴일 아침에, 내 삶은 진행중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5일 일하고 2일 쉬는 일상인데 일하는 게 사는 것인지 쉬는 게 사는 것인지 들여다봅니다. 흐르는 시간 속을, 나를 정지시킨 채 시간의 흐름에 흘러만 가고 있는 건 아닌지 물어봅니다. 엊그제 내리던 눈을 눈으로만 보았던 생각이 싸하게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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