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과에 핀 얼룩을 손으로 쓱쓱 문지르니
점액질이 끈끈하게 배어 나온다
얼굴에 핀 검버섯처럼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반짝거린다
모과의 귀에 면봉을 깊숙이 넣으니
갈색의 가루가 묻어 나온다
너는 그것이 벌레의 똥이라고 우기고
나는 달빛을 밟던 고양이들의 발소리라 하고
천둥소리에 놀라 날아들던 새의 날갯짓 소리라 하고
새벽바람에 잔가지 서로 부딪던 소리라 하고
첫서리 내려앉던 아침 새끼 고라니 울음소리라 하고
면봉으로 조심스레 그것들을 끌어내니
온갖 소리들 잠잠하다
구멍이 깊다
구멍 속에서 노란 벌레 한 마리가
향내 가득한 사막을 건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영선 시인의 '모과의 귀지를 파내다' 전문
이 시는 이영선 시인의 시집 <모과의 귀지를 파내다>에 실려있다.
요즘 모과나무 있는 곳을 지나다 보면 낙과가 많이 보인다. 그래서 이 시가 더 와닿았던 것 같다. 시인은 "모과에 핀 얼룩"과 "사람의 얼굴에 핀 검버섯"을 동일시 한다. 이것은 보기 흉한 결점일 수도 있지만 시인은 "반짝거린다"고 표현했다. 자연이든 인간이든 모든 것이 낡고, 변하고, 사라지지만 그것은 존재가 시간 속에 남긴 존엄한 기록일 것이다. 반짝거리는 생명의 흔적인 것이다. 그 귓구멍 같은 얼룩의 깊은 구멍 안에는 그동안 살아온 온갖 소리가 들어있다. 소리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것들을 끌어낸 "구멍 속에서" 어린 노란 벌레 한 마리가 자신이 지나온 사막을 건너는 것이 보인다. 그 사막이 비록 외롭고, 고단하고, 힘들지라도 노년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향내 가득한 여정일 것이다. 단순한 자연 풍경을 넘어 세대의 연속성을 읽게 된다.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진리의 본질에 대하여>란 책에서 '진리는 은폐 속에서 드러난다'고 했다. 그 은폐된 공간은 '동굴'이나 '구멍'을 뜻한다. 시를 읽다 보면 독자는 그 모과 "구멍 속에서" 다른 생명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존재의 끊임없는 순환을 마주하게 된다. 삶의 깊이가 느껴지는 시다.
어향숙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김유정 신인문학상'(2016)을 받았다. 시집으로 《낯선 위로가 눈물을 닦아주네》가 있다.
[아이즈앨범] 길고 긴 터널의 끝
길고 긴 겨울의 북풍 한설 끝에 봄이, 아주 벅찬 그리하여 완전한 봄이 왔습니다. 너무나 간절하게 간절하게 기다리고 기다리며 애태우던 절망의 그 절망이 사라지고 매화, 그 희망의 봄이 왔습니다.
'아이즈 앨범' 1999년 어느 겨울 새벽
아주 추운 어느 새벽 나의 밤의 미행은 계속되었고 갑자기 친구가 나타났다 외투를 벗어주고 싶었지만 야박하게도 렌즈 노출이 3분을 넘어가고 있었다.파르르 떠는 몸의 파동과 온기를 나눌 연민의 차이처럼 찰라가 만든 결과 뒤 밀려드는 타자들의 고통이 어두웠다. 오늘처럼 쇄골이 시리면 생각나는 그 겨울 그 시간... *2001년 사진전, ...
얼어 붙은 땅에 노란 납매 그리고 동백
꽁꽁 얼어 붙은 날씨였으면 더 신기하고 감격으로 채워졌을 텐데...대한민국이 얼어붙고 혼란스러운 계절납매와 동백이가 핀 1월 따뜻한 봄을 기다려 본다
[아이즈앨범] 첫눈이 말하는 폭설 이야기
큰눈이 내려주었다차는 차대로 엉거주춤사람은 사람대로 조심조심건물들도 내리는 눈에 모서리를 잃어간다모두가 흐려지는 날인데눈 녹은 자리에 다시 큰눈 내리고내리는 만큼 길이 질퍽해져도입가에 번지는 웃음이 있다첫눈이 많이 왔다는 말과 첫눈이 빨리 왔다는 말이 있다오늘 몇 시에 나왔냐는 물음과 퇴근길은 괜찮겠냐는 물음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