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시아의 호모룩스(Homo Lux) 이야기] - 불꽃이 된 은행나무]
  • 박정혜 교수
  • 등록 2024-11-25 00:00:01
  • 수정 2025-01-14 21:53:01

기사수정



라디오 방송 '출발 FM과 함께'의 11월 19일 오프닝멘트는 시 한 구절이었다. 인용된 부분만 캡처해서 보내주니 상대는 이렇게 물어왔다. 상처 회복에 관한 시인가요? 이문재의 시 '시월'이라는 시 전문을 보자. 그래야 답할 수 있으리라. 

 

"투명해지려면 노랗게 타올라야 한다. / 은행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 은행잎을 떨어트린다. / 중력이 툭, 툭, 은행잎들을 따간다. / 노오랗게 물든 채 멈춘 바람이 / 가볍고 느린 추락에게 길을 내준다. / 아직도 푸른 것들은 그 속이 시린 시월 / 내 몸 안에서 무성했던 상처도 저렇게 / 노랗게 말랐으니, 뿌리의 반대켠으로 / 타올라, 타오름의 정점에서 / 중력에 졌으리라, 서슴없이 가벼워졌으나 / 결코 가볍지 않은 시월 / 노란 은행잎들이 색과 빛을 벗어던진다. / 자욱하다, 보이지 않는 중력"

 

내친김에 이 시를 수업 오프닝멘트로 삼았다. 이루마의 'River Flows in You' 선율을 배경으로 삼아 한 학생한테 낭송해 보라고 했다. 강의실은 삽시간에 '노오랗게' 번져 올랐다. 결국은 투명해지기 위해 노랗게 타오르는 불길을 보았다. 그러다가 돌연 잎을 떨어트린다. 나뭇잎들은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을 결단코 주저하지 않는다. 안타까워서 조금만 더 있으라고 주문을 걸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저 스치는 바람의 손길에도 왈칵 지고 만다. 

 

아직도 물들지 않는 은행잎이 있던가? 시월에는 간혹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시인은 '그 속이 시린 시월'이라고 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채 다 잊었다고 태연한 척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속은 노랗게 멍들어있다. 그걸 숨기느라, 숨겨야 살아낼 수 있어서 잠자코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결국은 물이 든다. 물들지 않더라도 떨어지고 만다. 무성했던 상처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살아가는 동안 말랐던 그것들은 '뿌리의 반대켠'인 우듬지, 있는 힘껏 길어 올려 하늘과 마주한 곳까지 타오른다. 타오르다가 그 '정점'에서 장렬하게 산화한다. 

 

그 놀라운 가벼움은 결코 가볍지 않다. 노랗게 불타오른 시간은 고스란히 각인된다. 색과 빛을 벗어던진 은행나무들은 고요하다. 중력이 따간 흔적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다. 선연한 빛깔로 불타오르는 은행잎은 이제 다른 차원에서 만날 수 있다.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 인간군상이 있는 삼차원에서는 오로지 자욱할 뿐이다.

 

그러니, 도대체 이 시는 상처 회복인가? 섭리와 순응인가? 세월의 흐름에 대한 위로인가? 절묘한 배경음악처럼 시의 강이 당신에게로 흘러가고 있다. 또 다른 시 '큰 꽃'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꽃은 지지 않는다 / 나무는 꽃을 떨어뜨리고 / 더 큰 꽃을 피워낸다 / 나무는 꽃이다 / 나무는 온몸으로 꽃이다" 잎을 거의 떨군 11월의 은행 나무한테 박수를 보낸다. 있는 그대로, 온몸으로 불꽃이 되었다고. 

 

* 호모 룩스(HOMO LUX)는 빛으로서의 인간이다. 라틴어로 인간(HOMO)'와 빛(LUX)의 결합어다. 

 

* '호모룩스 이야기'는 치유와 결합한 시사와 심리, 예술과 문화에 대한 에세이다. 

덧붙이는 글

박정혜 교수는 1급 정신보건전문요원, 1급 보육교사, 1급 독서심리상담사, 미술치료지도사, 문학치료사, 심상 시치료사다. 2006년 <시와 창작> 신인상, 2015년 <미래시학>신인상을 받았고 소설로는 2004년 <대한간호협회 문학상>, 2017년 <아코디언 북>에 당선됐다. 현재 심상 시치료 센터장으로 전주대 한국어문학과, 전주비전대 간호학과, 한일장신대 간호학과, 원광보건대 간호학과 겸임교수다.

관련기사
TAG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포토/영상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최신뉴스더보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가스공사, 10억 투자해 평택 가스화재훈련센터 내 실내 체험관 새단장 한국가스공사가 평택 가스화재훈련센터 내에 실내 체험관을 새롭게 단장해 국민과 임직원을 대상으로 재난안전 체험 교육을 시행한다.가스공사는 21일 김환용 안전기술부사장 등 관계자 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체험관 개관식을 진행한 것. 김 부사장 등은 재난 교육 프로그램에 직접 참여해 시설 안전성과 교육 효과성을 점검하는 시간도 ...
  2. 인천의 문화·도시 연구 위해 인문학자·문화예술인·도시행정가·언론인·시민 모였다···19일 '인문도시연구소' … 인천문화와 도시 연구자들이 <인문도시연구소>(Humanistic City Institute)를 열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연구소는 구월동에 마련했다. 19일 개소식에는 인문학자와 문화예술인, 도시행정가, 언론인, 시민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주요 사업으로는 인천과 도시에 관한 인문학적 연구 및 연구방법론 체계화, 인천과 도시에 대한 정보 및 연구 ...
  3. 하나은행, 국민·농협·신한·우리·IBK과 공동 본인확인서비스 MOU 체결···"인증서 부정사용·금융피해 방지한다" 하나은행이 21일 국내 주요 은행(국민·농협·신한·우리·IBK)과 함께 은행권 공동 본인확인서비스 추진 및 마케팅을 위한 MOU를 체결했다.금융권 인증서는 금융기관 특유의 강화된 다중 보안 시스템을 갖췄으며, 이용자가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인 '본인확인' 수단이다. 그동안은 은행별로 사용했는데 이...
  4.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을 들고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멀리 쑥꾹 쑥꾹 쑥꾹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다시 한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
  5.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건망증1 창문을 닫았던가출입문은 잠그고 나왔던가계단을 내려오면서 자꾸만 미심쩍다다시 올라가 보면 번번이잘 닫고 잠가놓은 것을퇴근길 괜한 헛걸음이 벌써한두번이 아니다오늘도 미심쩍은 계단을그냥 내려왔다 누구는마스크를 쓴 채로 깜박 잊고가래침도 뱉는다지만 나는그런 축에 낄 위인도 못된다아마 잘 닫고 잘 잠갔을 것이다혼자 남은...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