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 옆에 앉아 공책을 펼쳤다. 우리는 우리가 태어난 지붕이 빨간 방갈로를 비밀의 방이라 이름 붙였다. 방갈로에 누워 우리가 태어난 상황을 얘기하며 웃기도 했고 울기도 했다. 우리들 중 누구도 할머니에게 아버지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다. 횟집 여자들이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으로 충분히 짐작을 했고 서로 생각을 확인하지도 않았다. 미라와 나는 함께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미라는 내게 이모라 부르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지 않았다. 이모가 친구래. 또래 아이들은 출생의 비밀을 떠벌리고 싶어 했다. 우리는 아이들의 호기심을 채워주고 비위를 맞추며 시시하게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여름밤이면 모기장을 걸어놓고 옆 방갈로에서 들리는 기타소리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연인이 든 방갈로를 기웃거리다 할머니에게 야단을 맞기도 했다. 그런 밤이면 미라는 남자어른 흉내를 내며 내 몸을 더듬었다. 여름이 끝나면 손님들이 방갈로에 두고 간 물건을 모아 정리했다. 슬리퍼 바닥에 두고 간 날짜를 적어 두었고 향이 좋은 화장품은 공동 소유로 해서 비밀의 방 상자에 넣어 두었다. 나는 머리핀과 모자는 아무리 예뻐도 버리자고 했다. 할머니가 남이 머리에 사용하던 것을 쓰면 그 사람의 고민이 고스란히 자신에게 온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엄마가 모래사장에서 주운 머리핀을 머리에 꽂아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미라는 보란 듯이 핀을 꽂고 모자를 썼다. 횟집 앞, 의자에 앉아 있던 여자들은 우리를 보면 뒤에서 엄마가 미쳤다고 수군거렸다. 그러면 미라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그들을 노려보며 소릴 질렀다.
“미친년들, 누구더러 미쳤대.”
나무로 만든 방갈로 벽에는 손님들이 왔다간 흔적을 남겨 놓았다. ‘진아, 범태 왔다감, 진아야 영원히 사랑해.’ 비밀의 방 벽에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이란 글씨 아래 각자 생각나는 대로 썼다. 낙서는 우리가 이곳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지붕이 빨간 방갈로에 쌓인 눈, 비 오는 날의 바다, 여름이 끝나는 날, 바다에서 떠오르는 갓 잡은 멍게 같은 해.’
공책의 첫 장을 소리 내 읽고 미라에게 건넸다. 미라는 건성으로 뒤적거리다 한 부분을 펼쳐 읽었다. 내가 일기를 쓴 부분이었다. 나는 곤색 스웨터를 들고 보풀을 뜯어냈다. 미라는 공책을 펼쳐든 채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때, 여관에 갔었니? 난 네 친구 집에 간 줄 알았어.”
미라 옆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미라가 남자를 데리고 올 때마다 내가 여관으로 갔다는 것을 적은 부분이었다. 우리가 나란히 대학에 합격하자 할머니는 방갈로가 있는 솔밭을 콘도를 지을 계획을 하고 있는 건설업자에게 팔았다. 우리는 방갈로를 허물어버리는 것이 아쉬웠지만 도시로 가는 것에 잔뜩 흥분했다. 미라는 멋진 사랑을 하고 싶어 했고 나는 연애 소설을 쓸 결심을 했다. 우리는 처음으로 바다를 떠나 도시에서 살았다. 미라는 입학하자마자 남자를 사랑했고, 짧은 시간 열렬히 만난 후 헤어졌다. 곧 다른 남자를 만났다. 미라가 남자를 데리고 올 때 나는 여관에 갔다. 바닥이 차가운 여관에 누워 알몸으로 바다에 뛰어든 엄마, 젊은 할머니, 방갈로, 미라와 바다를 두고 했던 맹세들을 떠올렸다. 방학 때 미라는 도시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나는 할머니 집에서 민박 손님을 받았다. 방갈로를 허물기 전, 나는 벽에 써놓은 낙서를 공책에 옮겨 적었다. 우리가 공책을 한 장 넘길 때 김 씨가 대문을 들어섰다.
김 씨는 배의 시동을 걸곤 담배에 불을 붙였다. 미라는 치맛자락을 잡고 배에 올라탔다. 서걱거리는 치맛자락에 모래 때가 묻어 누렇게 얼룩졌다. 한 무릎을 세우고 앉은 미라는 내가 건네는 상자를 못 본 척했다. 김 씨가 상자를 받아주었다. 배는 오십 미터 즈음에 있는 바위를 지나 멈추었다. 멀리 간판이 보였다. 지금은 잘 안보이지만 ‘파도민박’이라는 글씨가 적힌 간판이었다. 어둠이 내려앉았을 때는 환하게 불 밝혀 집의 위치를 알려줄 것이었다. 보자기를 풀고 상자를 열었다. 손에 한 움큼 쥔 할머니의 뼛가루를 바다에 뿌렸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가루가 차분하게 물결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가루가 된 할머니의 몸은 가벼웠다. 할머니의 손으로 태어난 내가 할머니를 바다 위에 뿌려주었다. 나는 유골분 상자를 미라에게 건네주었다. 미라는 상자를 받지 않았다. 할머니의 뼛가루가 파도 위를 넘실 뜨다가 가라앉았다. 나는 가루가 배 위에 떨어지지 않게 조금씩 덜어 바다 위에 뿌렸다. 할머니 몸 전체가 가루로 뒤섞여 어디가 팔이고 어디가 다리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가루이며 몸 전체인, 그것은 내 손에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며 소로로 떨어졌다. 거의 남지 않은 가루를 다시 미라에게 건넸지만 미라는 여전히 외면했다.
“마지막 가시는 몸, 둘이 사이좋게 거두어주지 않고서”
김 씨가 미라를 흘끗거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우리는 한참을 각자의 시선에 걸린 바다를 보며 앉아 있었다. 내가 마지막 남은 가루를 털기 위해 상자를 기울일 때, 미라가 고개를 들었다. 이마를 가린 머리칼이 바람결에 움직이자 사선의 상처가 보였다. 기울인 상자에서 마지막 한 줌을 덜어 뿌릴 때 확, 바람이 불었다. 뼛가루가 우리 쪽으로 날렸다. 미라의 얼굴에 할머니의 뼛가루가 달라붙었다. 미라는 자신의 뺨을 치며 가루를 털어냈다. 나는 뱃전에 흩뿌려진 하얀 가루를 손으로 쓸어 모아 바다에 뿌렸다. 김 씨가 어깨를 톡톡 털어내는 미라를 쳐다보곤 거칠게 모터를 돌렸다. 배가 바다를 가르며 할머니가 떠다니는 물결을 넘었다. 배에서 내린 미라는 김 씨에게 목례하곤 집을 향해 걸어갔다. 야속한 것, 이라 말하는 김 씨에게 인사하는 내 콧등이 잠깐, 시큰거렸다. 미라가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제, 미라는 짐을 챙겨 떠날 것이다. 항을 돌아 집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미라는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댓돌 위에 앉아 있었다. 신발을 옆에 벗어 놓고 모래에 발을 묻었다. 열린 방문 가까이 커다란 가방이 놓여 있었다.
-다음주에 이어집니다.
박정윤 소설가는 강원도 강릉 출생이며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에 《강원일보》 신춘문예, 「바다의 벽」으로 당선된 뒤 2005년에 「길은 생선 내장처럼 구불거린다」로 《작가세계》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프린세스 바리』로 제2회 혼불문학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프린세스 바리』, 『목공소녀』, 『연애독본』, 『나혜석 , 운명의 캉캉』, 『꿈해몽사전』 등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