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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부부
  • 어향숙 시인
  • 등록 2025-12-13 22:24:38
  • 수정 2025-12-14 04: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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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란 여름날 멀찍이 누워 잠을 청하다가도

어둠 속에서 앵 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만 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나머지를 어디다 바를까 주저하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달에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함께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손을 한번 쓸쓸히 쥐었다 펴 보는 사이이다


서로를 묶는 것이 거미줄인지

쇠사슬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부부란 서로 묶여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느끼며

오도 가도 못한 채

죄 없는 어린 새끼들을 유정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이이다


-문정희 시인의 시 '부부' 전문



이 시는 문정희 시인의 시집 <다산의 처녀>에 실려있다.


며칠 전 지방에 볼일이 있어 새벽길을 나서는데 너무 추워 고민하다가 남편 내복 하의를 안에 입은 적이 있다. 좀 크긴 해도 입는 순간 얼마나 따뜻했는지, 그때 이 시가 생각나 웃었던 적이 있다.


부부는 멀찍이 떨어져 누워 있다가도 모기 소리 들리면 합세하여 잡고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다. 그러면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떠올리는 낭만보다는 생활에 가까운 관계다.


알랭바디우는 <사랑예찬>에서 '사랑은 사건(event)으로 시작하지만 감정의 뜨거움이 아니라 두 사람이 하나의 세계를 꾸준히 만들어 가는 실천'이라고 했다. 


부부는 '사랑'으로 시작해도 '불꽃'이 아닌 반복되는 '충실성'과 '존재의 지속'임을 말한다. 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수많은 반복과 시간의 공유 속에서 서로의 삶에 문신처럼 깊이 흔적을 남긴다. 가벼운 "거미줄인지" 무거운 "쇠사슬인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서로 묶여있는 것은 분명하다. 나도 상대방처럼, 상대방도 나처럼,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다.


쉬운 언어로 쓰여있지만 삶의 성찰이 느껴지는 시다.


덧붙이는 글

어향숙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김유정 신인문학상'(2016)을 받았다. 시집으로 《낯선 위로가 눈물을 닦아주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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