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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바이킹
  • 어향숙 시인
  • 등록 2025-07-20 13:09:47
  • 수정 2025-07-22 07: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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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은 낡은 군복을 입고 담배를 문 채로
그냥 대충 타면 된다고 했다
두려운 게 없으면 함부로 대한다
망해가는 유원지는 이제 될 대로 되라고
배를 하늘 끝까지 밀어 올렸다
모터 소리와 함께 턱이 산에 걸렸다
쏠린 피가 뒤통수로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원래는 저기 저쪽 해 좀 보라고 여유 있는 척
좋아한다고 외치려 했는데
으어어억 하는 사이 귀가 펄럭거리고
너는 미역 같은 머리칼을 얼굴에 감은 채
하늘 위에 뻣뻣하게 걸려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공포가 되었다
나는 침을 흘리며 쇠 봉을 잡고 울부짖었고
너는 초점 없는 눈으로 하늘을 보면서
무슨 대다라니경 같은 걸 외고 있었다
삐걱대는 뱃머리 양쪽에서 우리는
한 번도 서로를 부르지 않았다
내가 다가갈 때 너는 민들레처럼
머리칼을 펼치며 날아가 버리고
네가 다가올 땐 등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즐겼다
뒷목을 핥는 손길에 눈을 감았다
교회 십자가가 네 귀에 걸려 찢어지고 있었다
내리막길이 빨갛게 물들어 일렁거렸다
네가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 순간 알았다 더는 바다가 두렵지 않다고
이 배는 오래됐고 안이 다 삭아버려서
더 타다가는 우리 정말 하늘로 간다고
날아가는 기러기의 등을 보면서
실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너를 보면서
눈 밑에서 해가 타는 것을 느꼈다
벌어지는 입을 틀어막았다

 

-이 시는 고명재 시인이 쓴 202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유원지에서 놀이기구 '바이킹'을 탔을 때의 느낌을 아주 실감나게 표현했다. 생동감 넘치는 풍경 묘사는 독자로 하여금 쾌락과 공포를 동시에 느끼게 할 뿐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마주하게 한다. 짧은 순간의 상황 묘사와 심리 표현이 아주 섬세하게 표현되어 같이 바이킹을 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망해가는 유원지(세상)가 될 대로 되라고 끝까지 밀어낸 배(가정)를 떠올릴 수도 있다. "너"와 "나"는 삐걱대는 뱃머리 양쪽에서 서로에게 공포가 된다. 내가 다가가면 너는 날아가 버리고 너가 다가오면 나는 등 뒤 바람을 즐기며 딴짓을 한다.


서로 신뢰를 못하니 힘든 순간에도 서로를 부르지 않게 된다. 대신 나는 침을 흘리며 쇠 봉을 잡고 울부짖었고 너는 초점 없는 눈으로 하늘을 보면서 무슨 대다라니경 같은 주문만 외고 있었다. 내리막길에서도 빨갛게 물든 분노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너를 보며 배(가정)를 더 타다가는 함께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대충 타면 된다는 불안한 '사회'와 두려움 없이 함부로 대하는 '부부'는 배가 산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상대방을 존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한 시 같다.

덧붙이는 글

어향숙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김유정 신인문학상'(2016)을 받았다. 시집으로 《낯선 위로가 눈물을 닦아주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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