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의미 있는 작품을 만난 것 같다. 최근에 출간된 오시로 고가니의 『해변의 스토브』(김진희 옮김, 문학동네, 2025)다. 이 텍스트가 의미 있는 텍스트라고 판단한 이유는 동시대의 특징을 고스란히 잘 반영하고 있어서다. 동시대가 추구하는 보편적인 시대적 흐름을 부족함 없이 응축해 표현해내고 있으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동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동시대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겠지만, 매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숏츠(short)의 시대'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이 시대는 긴 서사를 원하지 않는 시대, 서론이 아닌 본론이 적극적으로 요구되는 시대, 탄탄한 기승전결을 선호하기 보다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2025)처럼 자극적이고 원초적인 '감각'이 우선시 되는 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일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이곳의 사람들은 짧은 영상을 집게 손가락으로 빠르게 넘기며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다양한 숏츠를 소비한다. 광고도 리뷰도 기사도 맛집도 어려운 과학이론도, 무거운 철학적 질문도 응축되어 숏츠'화'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에 출간된 어느 책의 저자는 과거의 서사 방식인 '이야기'와 숏츠에 해당되는 '스토리'를 구분해 "이야기와 달리 스토리는 친밀감도, 공감도 불러내지 못한다. 이들은 결국 시각적으로 장식된 정보, 짧게 인식된 뒤에 다시 사라져 버리는 정보다. 이들은 이야기하지 않고 광고한다"(한병철, 『서사의 위기』, 다산초당, 2023, 121쪽)고 적었다.
이처럼 그는 '이야기'가 아닌 자본화되고 있는 '스토리'의 확산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담았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부의 평자들은 철학자의 이 발언에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라고 비판한다. 한마디로 말해 "지루함을 극도로 혐오하는 이 시대의 트렌드에 발맞춰 시작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어야 하고, 이야기 내내 재미를 줄 수"(현유석·정종찬·정다솔, 『스토리 혁명』, 다산북스, 2025, 26쪽) 있는 작품이 의미 있다고 발언한다.
이는 '이야기'보다 '스토리'에 무게를 둔 것으로 우리는 스토리 담론과 이야기 담론이 충돌하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스토리 담론은 감각적인 면을 어필하며 독자들을 설득했고, 이야기 담론은 오랜 시간 이어오던 전통에 힘입어 '스토리' 담론을 견제한다.
어느 입장이 옳고 그르건 간에 동시대는 '이야기'를 옹호하는 감정과 '스토리'를 옹호하는 감정이 거세게 충돌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과거의 유산을 전적으로 수긍하기보다는 다른 길에 해당되는 '스토리'의 길을 모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만화가들에게 이러한 시대적인 흐름이 자연스럽게 작품을 운용하는 영역까지 확장된다는 것이다. 만화가들은 암묵적으로 두 시선의 '차이'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새롭게 경작한다.
『해변의 스토브』표지
어쩌면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현상인듯 하지만 환상이 아닌 현실에서 재배치된 세계는 한 명의 개인을 구속한다. 예를 들어 숏츠 세대의 한 만화가가 자신의 만화를 그린다고 했을 때, 그는 어떤 방식이든지 '시대적 습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니 탄탄한 서사가 정답이라고 요구하는 이야기의 시대에 태어난 기성 만화가와 숏츠 시대에 태어난 젊은 만화가는 만화를 재현하는 방식에서도 차이를 품게 된다.
이것은 개인의 역량이기도 하겠지만, 시대의 무의식과 밀접하게 관련있다. 물론, 모든 만화가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기술로 인한 시대의 무의식은 예술가의 몸을 새롭게 재구성한다. 시대의 무의식으로 이뤄진 세계관은 숨을 쉬는 것과 무관하지 않아서 예술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다. 이런 맥락에서 많은 작품이 숏츠 시대의 특징을 자신의 작품에 오랜 시간 반영했다고 확신한다. 분명히 누군가는 일정부분 성공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감각을 익히지 못해 처참히 실패하거나 만화판에서 물러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반영이 일시적인 실험으로 그치는 경향이 적지 않다. 또한 시대적인 특징을 잘 반영해 어느 정도 가치를 획득할 수 있겠지만, 이 결과물을 무작정 좋은 작품이라고 단정하기 힘들다. 한마디로 말해, 형식은 숏츠나 내용을 잘 담아내지 못해 작품이 안 되는 것들이 이에 속한다. 아무리 숏츠의 시대라고 하더라도 작품이 안 되면, 시대적인 특징과 장점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중세시대건, 근대시대건, 현대시대건 작품이 받쳐 주어야 시대적인 특징도 보관 잘 된 미라처럼 부패하지 않고 오래간다.
이런 맥락에서 젊은 여성 만화가 오시로 고가니의 《해변의 스토브》는 시대적인 특징은 물론, 이야기의 영역까지 완벽하게 새로운 그릇에 담아낸 작품이라고 판단된다. 누군가에게는 아쉬운 점도 있겠지만, 내겐 어느 것 하나 감동적이지 않은 작품이 없었다.
텍스트에 수록된 〈해변의 스토브〉, 〈설녀의 여름〉, 〈당신이 투명해지기 전에〉, 〈눈을 껴안다〉, 〈바다 밑바닥에서〉, 〈눈 내린 마을〉, 〈소중한 일〉은 탄탄한 이야기와 내용으로 하고 싶은 말을 가벼운 형식 체제 안에서 진중하게 풀어낸다. 무엇보다도 일본 문학의 한 장르인 '하이쿠' 형식을 적절히 반영한 것도 숏츠 시대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해변의 스토브』목차
단편이 끝날 때 10~15글자로 요약해 독자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만화를 넘어 문학의 영역에서 잡아낼 수 있는 언어의 맛까지도 느끼게 해준다. 이는 하나의 장르에 여러 장르가 융합되는 시대의 특징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세계관을 운용하는 방식도 숏츠의 시대적 흐름과 유사하지만 밍밍하지 않게 내용을 채운다.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판타지의 형식을 가져와 만화가가 하고 싶은 말을 훌륭하게 해낸다. 가령, 공포의 대상이 되어 오래도록 자신(설녀)을 잊지 못하게 만든다는 엉뚱한 설정부터, 교통사고로 투명인간이 된 남편의 이야기, 말하는 난방장치인 스토브(Stove)가 인간 연애에 개입한다는 설정까지 만화가는 조금은 엉뚱한 상상을 끌어오지만, 이 엉뚱함이 엉뚱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만화가가 끌고 가는 이야기의 소재와 형식이 조화롭게 이뤄지고 있어서다.
무엇보다도 이런 설정을 통해 만화가는 인간의 진실에 조금은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한다. 당신의 사랑이 왜 미숙했는지, 당신이 정말로 사랑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좋아하는 일을 즐기며 노동하고 있는지 등에 대해 무게감 있게 질문한다. 어떻게 보면 오시로 고가니의 만화는 낭만적 정신이 진득하게 뭍어 나오는 만화라고도 부를 수 있다. '이곳'의 불가능으로 인해 주저앉기보다는 조금은 더 나은 '저곳'의 가능성을 셈하고 있어서다.
지금까지 숏츠의 시대적인 특징인 짧은 서사, 응축, 요약, 간편, 편리 등 개념을 오시로 고가니는 단편 만화에 가볍지 않은 방식으로 진중하게 끌어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시대의 '형식'을 성공적으로 '내용'과 융합한 텍스트라는 말을 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오시로 고가니의 작품을 통해 이를 증명해보고자 한다. 순서는 '회전된 내재적 정치성', '회전된 창작의 문법', '회전하는 타이밍과 앞으로의 전망'이다.
그림 윤움 / 문종필 평론가
문종필 평론가는 대한민국만화평론 공모전 수상집에 「그래픽 노블의 역습」 「좋은 곳」 「무제」를 발표하며 만화평론을 시작했다. 문학평론집 〈싸움〉으로 〈죽비 문화 多 평론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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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긴 겨울의 북풍 한설 끝에 봄이, 아주 벅찬 그리하여 완전한 봄이 왔습니다. 너무나 간절하게 간절하게 기다리고 기다리며 애태우던 절망의 그 절망이 사라지고 매화, 그 희망의 봄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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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추운 어느 새벽 나의 밤의 미행은 계속되었고 갑자기 친구가 나타났다 외투를 벗어주고 싶었지만 야박하게도 렌즈 노출이 3분을 넘어가고 있었다.파르르 떠는 몸의 파동과 온기를 나눌 연민의 차이처럼 찰라가 만든 결과 뒤 밀려드는 타자들의 고통이 어두웠다. 오늘처럼 쇄골이 시리면 생각나는 그 겨울 그 시간... *2001년 사진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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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눈이 내려주었다차는 차대로 엉거주춤사람은 사람대로 조심조심건물들도 내리는 눈에 모서리를 잃어간다모두가 흐려지는 날인데눈 녹은 자리에 다시 큰눈 내리고내리는 만큼 길이 질퍽해져도입가에 번지는 웃음이 있다첫눈이 많이 왔다는 말과 첫눈이 빨리 왔다는 말이 있다오늘 몇 시에 나왔냐는 물음과 퇴근길은 괜찮겠냐는 물음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