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시아의 호모룩스(Homo Lux) 이야기'...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 보기
  • 박정혜 교수
  • 등록 2024-12-02 00:00:01
  • 수정 2025-01-14 21:43:12

기사수정

  



어김없이 마지막 달이 되었다. 한 해를 돌이켜 보면 모래알 같기만 하다. 손안에 쥐는 것은 죄다 흩어져 내린다. 추억은 소중하지만 가뭇없다. 또 이렇게 한 해가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인가! 

 

18세기에 활약한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순수의 전조' 첫 구절은 다음과 같다. "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를 보고 / 들판에 핀 한 송이 꽃에서 천국을 본다 / 그대의 손바닥에 무한을 쥐고 / 찰나의 시간 속에서 영원을 보라" 이 시의 다음 구절은 이러하다. 

 

"인간은 기쁨과 비탄을 위해 태어났으며 / 우리가 이것을 올바르게 알 때, / 우리는 세상을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다 / 기쁨과 비탄은 훌륭하게 직조되어 / 신성한 영혼에게는 안성맞춤의 옷" 

 

희로애락이 골고루 섞여 있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그것을 받아들일 때 세상을 잘 살아나갈 수 있다. 고결하고 거룩한 신의 속성을 가진 '영혼'에게는 그것이 딱 맞아떨어지는 옷이다. 게다가 블레이크는 "아름다움이 충만하고 진실한 혼은 더러워지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은 탄생의 순간에 주어지는 순수와 거리가 있다. 그런 순수는 갓 내린 눈밭과도 같다. 햇발이 내려앉아서 녹여지거나 누군가 지나가고 나면 순식간에 더러워진다. 태어나는 순간에 가졌던 순수는 변하기 마련이다. 무수한 인간관계와 마주한 상황에 의해 상처를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순수는 사라지는 듯하지만, 실상은 깊은 곳으로 숨어든다. 

 

한번 숨어든 순수를 불러내기란 쉽지 않다. 그 과정이 지난해서 쉽게 포기하며 살기도 한다. 고난 극복을 위한 각고의 정성이 이뤄질 때, 그러한 순수는 깨어난다. 이 놀라운 부활은 영혼의 때를 벗기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재탄생된 순수는 결코 빛바래지 않는다. 20세기 이탈리아 소설가 알베르토 모라비아는 "모든 것을 알고 난 뒤에 오는 순수는 결코 더럽히지 않는다"고 했다. 

 

태초의 순수로 머물 수 없는 삶이 슬픈 것이 아니라, 더할 나위 없는 순수가 될 수 있는 삶이 아름답다. 인간에게 그런 가능성이 주어져 있다. 매 순간 순수의 문이 열려있다. 20세기 미국의 시인 에드워드 에스틀린 커밍스는 "존재할 수 있거든, 단지 존재하라. 만일 그럴 수 없다면, 원기를 내서 다른 사람들의 일에 끼어들면서 스스로 지쳐 쓰러질 때까지 이런저런 일을 참견하면서 계속 그렇게 살아가라"고 했다. 가능성의 문을 닫는 데 전력을 쏟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자명하다. 그것을 '순수의 전조'에서 블레이크는 이렇게 노래했다. "열정 속에 있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 열정이 그대 속에 있는 것은 좋지 않다."

 

'나'라는 존재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궁극에는 어디에 가 있을지 알아차리는 것은 선불교식으로 말하자면 '본증묘수(本證妙修)'다. 본래의 깨달음으로 삶을 살아나가는 것 자체가 영묘한 수행의 과정이다. '나'를 우주의 에너지, 혹은 신과 하나로 인식하는 합일의식이 일어난다면,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그럴 때 열정에 휩싸이는 것이 아니라 열정 안에서 한껏 뛰어놀 수 있다. 나를 온전히 이끌고 가는 신의 불꽃 같은 눈동자를 떠올려본다. 그런 마음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려 한다. 

 

 

* 호모 룩스(HOMO LUX)는 빛으로서의 인간이다. 라틴어로 인간(HOMO)'와 빛(LUX)의 결합어다. 

 

* '호모룩스 이야기'는 치유와 결합한 시사와 심리, 예술과 문화에 대한 에세이다. 

덧붙이는 글

박정혜 교수는 1급 정신보건전문요원, 1급 보육교사, 1급 독서심리상담사, 미술치료지도사, 문학치료사, 심상 시치료사다. 2006년 <시와 창작> 신인상, 2015년 <미래시학>신인상을 받았고 소설로는 2004년 <대한간호협회 문학상>, 2017년 <아코디언 북>에 당선됐다. 현재 심상 시치료 센터장으로 전주대 한국어문학과, 전주비전대 간호학과, 한일장신대 간호학과, 원광보건대 간호학과 겸임교수다.

관련기사
TAG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포토/영상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최신뉴스더보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이슈픽] 강선우 의원 '보좌관 갑질' 논란···야당 "사퇴해야" vs 여당 "충실히 소명" 강선우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보좌관 갑질' 논란의 중심에 섰다. 문제를 제기한 보좌진들은 "자택 쓰레기 분리수거, 변기 수리 등 사적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어 "5년간 46명이 의원실을 떠났다"며 이례적인 인사 교체가 갑질의 방증이라는 목소리도 높다."변기 수리·쓰레기 분리수거까지"…...
  2.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가족 집에 들어서면 대문 옆에 헛간이 서고처럼 서 있는데 처마 끝에 도서 대여목록 카드처럼 여섯 자루의 호미가 꽂혀 있다. 아버지 호미는 장시간 반납하지 않은 책처럼 한번 들고 나가면 며칠씩 밤새고 돌아온다. 산비탈을 다듬는지 자갈밭을 일구는지 듬성듬성 이가 빠져 자루만 조금 길면 삽에 가까운 호미, 그 옆에 어머니 호미는 가장 많...
  3. [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바이킹 선장은 낡은 군복을 입고 담배를 문 채로그냥 대충 타면 된다고 했다두려운 게 없으면 함부로 대한다망해가는 유원지는 이제 될 대로 되라고배를 하늘 끝까지 밀어 올렸다모터 소리와 함께 턱이 산에 걸렸다쏠린 피가 뒤통수로 터져 나올 것 같았다원래는 저기 저쪽 해 좀 보라고 여유 있는 척좋아한다고 외치려 했는데으어어억 하는 사이 .
  4. [이슈픽] 국무회의 첫 생중계에 쏠린 시선···"투명성 강화" vs "긍적적 평가할 뻔" "국민이 정책 논의 과정을 볼 권리가 있다."2025년 7월 29일, 이재명 대통령이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국무회의 전 과정을 국민 앞에 생중계했다. 대통령의 모두발언만 공개되던 관행을 깨고, 1시간 20분 동안 주요 현안에 대한 장관들과의 실시간 토론까지 국민에게 여과 없이 공개했다.정치권의 엇갈린 반응: "투명성 강화" vs...
  5. [새책] 일과 자유, 삶의 품위를 묻는《나는 북경의 택배기사입니다》···현재를 희생하며 꿈꾸는 노동자들의 삶 택배기사, 물류센터 상하차, 패스트푸드 배달, 주유소 직원, 쇼핑몰 경비원, 온라인 쇼핑몰 창업 등 현장에서 일하며 인간의 품위와 자유를 고민한 한 청년의 기록이 있다. 고된 노동 속에서 마법 같은 순간을 발견하고 글쓰기를 하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월북에서 일하는 이들의 기쁨과 슬픔을 기록한 《나는 북경의 택배기사입니다》를 펴.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