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제6회 선경문학상 염민숙 시집 《밤은 너무 많거나 너무 적어》 출간
  • 금이루
  • 등록 2025-12-08 08:00:02
  • 수정 2025-12-08 08:48:13

기사수정
  • - 생활의 감각으로 세계 모순 꼬집는 시인
  • - 예리한 감각과 깊이 있는 윤리적 통찰
  • - 냉면집 면수서 최루탄 냄새를 맡는 시대의 증언
  • - 다정한 존대어·청유형 어조로 완성한 소통의 단절

염민숙 시인

올해 제6회 선경문학상을 받은 염민숙 시인 시집 《밤은 너무 많거나 너무 적어》가 상상인에서 출간됐다. 시집은 '생활의 감각'을 거창한 이념이나 난해한 추상어, 화려한 수사 대신, 지극히 일상적이고 손에 잡히는 사물들로 삶의 부조리를 조용히 드러낸다.


염민숙 시인은 관념으로 도망치지 않는다. 그의 시에서는 어항 속 새우, 실비니아 쿠쿠라타, 냉면집 면수, 페스츄리 반죽, 초록색 앵무새, 침대, 의자와 그네, 눈사람, 산수유 길 등 주변의 흔한 풍경들이 새로운 윤리적 통찰로 살아난다.


시인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때,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우리는 감각으로 타인에게 다가가지만, 감각으로 고립을 선택하기도 한다. 염민숙의 시에서 이 미세한 힘의 충돌과 뒤틀림의 세계는 삶을 이해하기 위한 표현으로 나타난다.



페스츄리·평양냉면 면수에 담긴 '구체적인 생활 감각'


시  '페스츄리 만들기'에서는 "날이 차가우면 페스츄리를 만들어요"라며 차가운 볼과 물, 찬 밀가루, 차가운 버터와 밀대의 감촉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주방에서 반죽을 접고 펴고 다시 접는 이 평범한 반복 동작은 단순하지 않다. 이 촉각적 이미지를 통해 시인은 사랑과 관계의 복잡미묘한 풍경으로 독자를 미끄러지듯 안내한다. 일상의 노동이 감정의 층위로 치환되는 순간, 독자는 시인이 포착한 삶의 이면을 마주하게 된다.


시인은 사소한 소재에서 거대한 부재와 이별을 끌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따뜻한 오해'는 평양냉면집 면수라는 아주 구체적인 소재에서 출발한다. 


"면수는 냉면 사리를 삶은 물이다 / 평양냉면집에서는 주전자에 면수를 담아 준다"는 건조한 설명은 곧이어 면수를 마시라던 엄마의 목소리, 최루탄 냄새가 진동하던 시절, 그리고 핀란드로 이민 간 친구의 기억과 겹쳐진다.


그러면서 평양냉면집 주전자에 면수를 담아 먼 곳으로 보내고 싶다고 한다. 생활 세계의 작은 사물 하나가 개인의 기억을 넘어 시대의 아픔과 이별의 감정을 극명하게 환기시킨다. 



염민숙 지음 / 상상인 / 12,000원


"밤은 공평하지 않다"…불평등을 향한 예리한 시선


시집 곳곳에 포진한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통찰 역시 수상의 주요 배경이 됐다. 표제시 '짧은 잠'은 어항 위에 떠 있는 수초 실비니아 쿠쿠라타와 그 아래 숨은 작은 새우들을 대비시키며 삶이 결코 공평하지 않음을 비유적으로 폭로한다.


"누구에게나 밤은 너무 많거나 너무 적어"라는 문장은 이 시집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다. 쉼과 어둠, 고독과 회복의 시간인 '밤'은 누구에게는 너무 길어 우울과 고립을 낳고, 누구에게는 숨 쉴 틈 없이 짧기만 하다. 빛과 그늘, 잠과 노동이 균등하게 분배되지 않는 현실을 직시하는 시인의 시선은 서늘하고도 정확하다.


관계의 폭력성을 형상화하는 독창적인 비유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뱀과 침대'에서 침대는 안식처가 아닌, 낯선 체취와 반복된 관계의 이력이 스며 있는 공간이다. 그 위를 건너가는 사람은 마치 "길을 다 건너지 못한 뱀"처럼 위태롭다.


'우리는 기린처럼'에서는 "수컷 기린처럼 온몸으로 싸워"라고 말하며 기린, 영양, 하마, 체체파리 같은 동물들의 투쟁을 빌려 인간관계의 전투적 면모를 그린다. '설희'에서는 피와 딸기잼, 어머니들의 계보를 겹쳐 놓으며 "당신과 나 단일 민족이라고 자랑하지 말자"고 일갈한다.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혈연과 민족이 저지르는 폭력과 배제를 비틀어 보인 것이다.



다정한 존대어와 청유형 어조 속에 숨겨진 단절의 미학


무엇보다 선경문학상이 이 시집에서 발견한 미학적 성취는 독특한 어조에 있다. 염민숙의 시는 "의자에 앉아요", "손을 담가요", "손 내밀지 말아요", "그럴 일이 없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와 같이 청유형과 존대어로 자주 끝맺는다.


겉으로는 상대를 배려하는 듯하지만, 이 정중함은 역설적으로 좁혀지지 않는 거리와 소통의 부재를 감싸는 얇은 막처럼 작동한다. 다정하게 말을 건넬수록 인물들은 서로 닿지 못하고 각자의 고립된 밤으로 밀려난다. 이 특이한 독서 경험은 독자로 하여금 고립과 단절을 더욱 명료하게 체감하게 만든다.


고광식 문학평론가는 "염민숙 시인의 감각은 끊임없이 증식하며 자아와 타자 사이를 지나 부조리의 세계를 확인하기까지 증식을 거듭한다. 타자에 다가갈 때마다 여러 사물을 관통해 자아에서 타자로, 그 너머의 세계로 나아가 사물을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며 다양한 형태로 만든다"고 호평했다.


《밤은 너무 많거나 너무 적어》는 화려한 수사 대신 생활의 언어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불평등한 시간을 정직하게 증언한다. 안이한 희망 대신, 각자의 불균형한 밤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밤을 바라보는 새로운 감각'을 나누자고 제안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조용하지만 어떤 외침보다 단단하다.

염민숙 시인은 2015년 머니투데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시라시》 《오늘을 여는 건 여기까지》를 썼다.

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포토/영상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최신뉴스더보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한국은행 소비자동향] 2026년 1월 소비심리 훈풍…'집값·금리 상승' 전망도 꿈틀 2026년 새해, 소비 심리가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1월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110.8을 기록한 것이다. 지난달보다 1.0포인트 오른 수치로 이 지수가 100을 넘으면 소비자들이 경제 상황을 과거 평균(2003~2025년)보다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주머니 사정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지수를 끌어올렸다. 6개월 전과 비..
  2. [수출입동향] 2026년 1월, 수출 600억 달러 시대 개막…반도체 끌고 미국·중국 밀었다 대한민국 수출이 2026년 새해 첫 달부터 유례 없는 대기록을 세우며 기분 좋은 출발을 알렸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2026년 1월 수출입 동향에 따르면, 1월 수출액은 전년 동월 대비 33.9%나 급증한 658.5억 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역대 1월 수출 중 처음으로 600억 달러 선을 돌파한 실적이자 8개월 연속 해당 월의 역대 최대 실적을 갈아치운 수...
  3. [경제포커스] 연봉 올랐는데 실수령액은 그대로?…2026년 건보료·국민연금 동반 인상 김당황 씨는 지난달 연봉협상에서 5% 인상이라는 기분 좋은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자신의 성과를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1월 월급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실수령액이 예상보다 훨씬 적었기 때문이다. 연봉은 올랐는데 통장에 들어온 돈은 지난해 12월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1월 월급날을 예상한 김 씨의 스토리다. 새...
  4. [한국은행 국내총생산] 2025년 GDP 1% 턱걸이 상승…4분기는 0.3% 감소 실질 GDP 속보치는 분기 마지막 월의 실적 자료를 모두 이용하지 못해 추후 공표할 GDP 잠정치와 차이가 있을 수 있음한국 경제가 2025년 연간 1.0% 성장을 힘겹게 달성했다. 웃을 수만은 없는 성적표다. 한국은행이 22일 발표한 '2025년 4/4분기 및 연간 실질 국내총생산(속보)'에 따르면, 지난 4분기 실질 GDP는 전기 대비 0.3% 감소하며 '역성...
  5. [아이즈인터뷰] 정우신 시인, 불확실한 미래 그려내는 섬세한 상상력 안녕하세요? 시간 내어 주어서 고맙습니다.  네, 안녕하세요. 초대하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인터뷰에 앞서 가벼운 질문드립니다. 요즘 어찌 지내시고 계신가요?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듯 언제나 제게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 끝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일상에선 주어진 삶의 시간이 허비되지 않도록 루틴을 만들어 수...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