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문종필의 문화문학] 긴 서사를 원하지 않는 '숏츠(short)의 시대'
  • 문종필
  • 등록 2025-11-05 00:00:02

기사수정
  • - 새로운 시대, 새로운 '만화책' 1편

오랜만에 의미 있는 작품을 만난 것 같다. 최근에 출간된 오시로 고가니의 『해변의 스토브』(김진희 옮김, 문학동네, 2025)다. 이 텍스트가 의미 있는 텍스트라고 판단한 이유는 동시대의 특징을 고스란히 잘 반영하고 있어서다. 동시대가 추구하는 보편적인 시대적 흐름을 부족함 없이 응축해 표현해내고 있으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동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동시대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겠지만, 매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숏츠(short)의 시대'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이 시대는 긴 서사를 원하지 않는 시대, 서론이 아닌 본론이 적극적으로 요구되는 시대, 탄탄한 기승전결을 선호하기 보다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2025)처럼 자극적이고 원초적인 '감각'이 우선시 되는 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일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이곳의 사람들은 짧은 영상을 집게 손가락으로 빠르게 넘기며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다양한 숏츠를 소비한다. 광고도 리뷰도 기사도 맛집도 어려운 과학이론도, 무거운 철학적 질문도 응축되어 숏츠'화'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에 출간된 어느 책의 저자는 과거의 서사 방식인 '이야기'와 숏츠에 해당되는 '스토리'를 구분해 "이야기와 달리 스토리는 친밀감도, 공감도 불러내지 못한다. 이들은 결국 시각적으로 장식된 정보, 짧게 인식된 뒤에 다시 사라져 버리는 정보다. 이들은 이야기하지 않고 광고한다"(한병철, 『서사의 위기』, 다산초당, 2023, 121쪽)고 적었다. 


이처럼 그는 '이야기'가 아닌 자본화되고 있는 '스토리'의 확산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담았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부의 평자들은 철학자의 이 발언에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라고 비판한다. 한마디로 말해 "지루함을 극도로 혐오하는 이 시대의 트렌드에 발맞춰 시작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어야 하고, 이야기 내내 재미를 줄 수"(현유석·정종찬·정다솔, 『스토리 혁명』, 다산북스, 2025, 26쪽) 있는 작품이 의미 있다고 발언한다. 


이는 '이야기'보다 '스토리'에 무게를 둔 것으로 우리는 스토리 담론과 이야기 담론이 충돌하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스토리 담론은 감각적인 면을 어필하며 독자들을 설득했고, 이야기 담론은 오랜 시간 이어오던 전통에 힘입어 '스토리' 담론을 견제한다. 


어느 입장이 옳고 그르건 간에 동시대는 '이야기'를 옹호하는 감정과 '스토리'를 옹호하는 감정이 거세게 충돌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과거의 유산을 전적으로 수긍하기보다는 다른 길에 해당되는 '스토리'의 길을 모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만화가들에게 이러한 시대적인 흐름이 자연스럽게 작품을 운용하는 영역까지 확장된다는 것이다. 만화가들은 암묵적으로 두 시선의 '차이'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새롭게 경작한다.


『해변의 스토브』표지

어쩌면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현상인듯 하지만 환상이 아닌 현실에서 재배치된 세계는 한 명의 개인을 구속한다. 예를 들어 숏츠 세대의 한 만화가가 자신의 만화를 그린다고 했을 때, 그는 어떤 방식이든지 '시대적 습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니 탄탄한 서사가 정답이라고 요구하는 이야기의 시대에 태어난 기성 만화가와 숏츠 시대에 태어난 젊은 만화가는 만화를 재현하는 방식에서도 차이를 품게 된다. 


이것은 개인의 역량이기도 하겠지만, 시대의 무의식과 밀접하게 관련있다. 물론, 모든 만화가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기술로 인한 시대의 무의식은 예술가의 몸을 새롭게 재구성한다. 시대의 무의식으로 이뤄진 세계관은 숨을 쉬는 것과 무관하지 않아서 예술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다. 이런 맥락에서 많은 작품이 숏츠 시대의 특징을 자신의 작품에 오랜 시간 반영했다고 확신한다. 분명히 누군가는 일정부분 성공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감각을 익히지 못해 처참히 실패하거나 만화판에서 물러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반영이 일시적인 실험으로 그치는 경향이 적지 않다. 또한 시대적인 특징을 잘 반영해 어느 정도 가치를 획득할 수 있겠지만, 이 결과물을 무작정 좋은 작품이라고 단정하기 힘들다. 한마디로 말해, 형식은 숏츠나 내용을 잘 담아내지 못해 작품이 안 되는 것들이 이에 속한다. 아무리 숏츠의 시대라고 하더라도 작품이 안 되면, 시대적인 특징과 장점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중세시대건, 근대시대건, 현대시대건 작품이 받쳐 주어야 시대적인 특징도 보관 잘 된 미라처럼 부패하지 않고 오래간다.


이런 맥락에서 젊은 여성 만화가 오시로 고가니의 《해변의 스토브》는 시대적인 특징은 물론, 이야기의 영역까지 완벽하게 새로운 그릇에 담아낸 작품이라고 판단된다. 누군가에게는 아쉬운 점도 있겠지만, 내겐 어느 것 하나 감동적이지 않은 작품이 없었다. 


텍스트에 수록된 〈해변의 스토브〉, 〈설녀의 여름〉, 〈당신이 투명해지기 전에〉, 〈눈을 껴안다〉, 〈바다 밑바닥에서〉, 〈눈 내린 마을〉, 〈소중한 일〉은 탄탄한 이야기와 내용으로 하고 싶은 말을 가벼운 형식 체제 안에서 진중하게 풀어낸다. 무엇보다도 일본 문학의 한 장르인 '하이쿠' 형식을 적절히 반영한 것도 숏츠 시대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해변의 스토브』목차 

단편이 끝날 때 10~15글자로 요약해 독자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만화를 넘어 문학의 영역에서 잡아낼 수 있는 언어의 맛까지도 느끼게 해준다. 이는 하나의 장르에 여러 장르가 융합되는 시대의 특징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세계관을 운용하는 방식도 숏츠의 시대적 흐름과 유사하지만 밍밍하지 않게 내용을 채운다.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판타지의 형식을 가져와 만화가가 하고 싶은 말을 훌륭하게 해낸다. 가령, 공포의 대상이 되어 오래도록 자신(설녀)을 잊지 못하게 만든다는 엉뚱한 설정부터, 교통사고로 투명인간이 된 남편의 이야기, 말하는 난방장치인 스토브(Stove)가 인간 연애에 개입한다는 설정까지 만화가는 조금은 엉뚱한 상상을 끌어오지만, 이 엉뚱함이 엉뚱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만화가가 끌고 가는 이야기의 소재와 형식이 조화롭게 이뤄지고 있어서다. 


무엇보다도 이런 설정을 통해 만화가는 인간의 진실에 조금은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한다. 당신의 사랑이 왜 미숙했는지, 당신이 정말로 사랑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좋아하는 일을 즐기며 노동하고 있는지 등에 대해 무게감 있게 질문한다. 어떻게 보면 오시로 고가니의 만화는 낭만적 정신이 진득하게 뭍어 나오는 만화라고도 부를 수 있다. '이곳'의 불가능으로 인해 주저앉기보다는 조금은 더 나은 '저곳'의 가능성을 셈하고 있어서다. 


지금까지 숏츠의 시대적인 특징인 짧은 서사, 응축, 요약, 간편, 편리 등 개념을 오시로 고가니는 단편 만화에 가볍지 않은 방식으로 진중하게 끌어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시대의 '형식'을 성공적으로 '내용'과 융합한 텍스트라는 말을 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오시로 고가니의 작품을 통해 이를 증명해보고자 한다. 순서는 '회전된 내재적 정치성', '회전된 창작의 문법', '회전하는 타이밍과 앞으로의 전망'이다. 




 그림 윤움 / 문종필 평론가 


덧붙이는 글

문종필 평론가는 대한민국만화평론 공모전 수상집에 「그래픽 노블의 역습」 「좋은 곳」 「무제」를 발표하며 만화평론을 시작했다. 문학평론집 〈싸움〉으로 〈죽비 문화 多 평론상〉을 받았다.

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포토/영상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최신뉴스더보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수출입동향] 2025년 12월 수출 695억 달러로 역대 최대…반도체가 끌고 무선통신기기가 밀었다 2025년 12월 대한민국 수출이 새 역사를 썼다. 반도체 업황 회복과 무선통신기기의 선전에 힘입어 지난달 월간 기준 역대 최대 수출 실적을 갈아치운 것이다. 수출액은 전년 동월 대비 13.3% 증가한 695억 달러를 기록하며 월간 기준 역대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2025년 6월 이후 7개월 연속 이어진 증가세다.수입은 4.6% 늘어난 574억 달러를 기록했..
  2. [가계대출동향] 2025년 '빚투 브레이크'...가계대출 37.6조 ↑로 증가폭 둔화 지난해 대한민국 가계부채가 다소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2025년 가계대출 동향'(잠정)에 따르면, 전 금융권 가계대출은 37.6조 원 증가했다. 2024년 증가폭 41.6조 원보다 4조 원가량 줄어든 액수로 연간 증가율은 2.3%를 기록했다.정부의 일관된 가계부채 관리 강화 기조가 시장에 영향을 미치며 GDP 대비 가계부채비...
  3. [한국은행 소비자동향] 2026년 1월 소비심리 훈풍…'집값·금리 상승' 전망도 꿈틀 2026년 새해, 소비 심리가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1월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110.8을 기록한 것이다. 지난달보다 1.0포인트 오른 수치로 이 지수가 100을 넘으면 소비자들이 경제 상황을 과거 평균(2003~2025년)보다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주머니 사정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지수를 끌어올렸다. 6개월 전과 비..
  4. [한국은행 경상수지] 2025년 11월 122억 달러 흑자...반도체 슈퍼사이클에 조선업 훈풍 2025년 11월, 대한민국 경상수지가 122억4000만 달러 흑자를 기록하며 1~11월 흑자 규모를 1018억2000만 달러가 됐다. 수출은 전년 동월 대비 5.5% 증가한 601억1000만 달러를 기록하며 외화 유입을 주도했고, 수입은 468억 달러로 0.7% 감소했다. 수출은 늘고 수입은 줄어드는 구조 속에 상품수지는 133억1000만 달러 흑자를 달성하며 전체 경상수지 개선을 ...
  5. [경제포커스] 연봉 올랐는데 실수령액은 그대로?…2026년 건보료·국민연금 동반 인상 김당황 씨는 지난달 연봉협상에서 5% 인상이라는 기분 좋은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자신의 성과를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1월 월급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실수령액이 예상보다 훨씬 적었기 때문이다. 연봉은 올랐는데 통장에 들어온 돈은 지난해 12월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1월 월급날을 예상한 김 씨의 스토리다. 새...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