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동 회장(NH농협 홈페이지)
자산 규모 800조 원. 대한민국 재계 1위 삼성의 600조 원을 가볍게 넘고, 국가 1년 예산인 674조 원마저 웃도는 거대한 자본이다.
전국 5000개가 넘는 지점과 200만 조합원을 거느린 농업협동조합중앙회. 그 정점에 선 중앙회장은 '농민 대통령'이라 불리며 막강한 권력을 쥔다.
그런 거대한 몸집 이면에는 곪아 터진 환부가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부합동부패예방추진단의 특별감사 결과는 충격적이다. 방만한 경영과 도덕적 해이가 조직 전반에 독버섯처럼 퍼져 있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사금고로 전락한 재단, 선거판 얼룩지게 하다
'공룡' 농협을 이끄는 제25대 강호동 회장 역시 이번 감사의 거센 후폭풍을 피하지 못했다. 정부는 강 회장을 비롯한 핵심 간부들의 횡령과 권한 남용 혐의를 포착하고 전격 수사를 의뢰했다.
가장 뼈아픈 대목은 '선거 답례품'이다. 강 회장은 농협 재단 핵심 간부를 통해 재단 사업비를 유용, 자신의 회장 선거를 도운 조합장들에게 제공할 선물을 조달한 혐의를 받는다.
심지어 중앙회 소속 일부 부서의 공금까지 끌어다 쓴 정황이 확인됐다. 농민을 위해 쓰여야 할 재단 자금이 개인의 권력 유지를 위한 사금고로 전락한 셈이다.
김영수 국무조정실 국무1차장이 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농협 정부합동 특별감사 결과 브리핑을 하고 있다.(KTV 캡처, 20260309)
황금열쇠와 사치품…고삐 풀린 방만 경영의 실태
비위는 회장실 문턱을 넘어 조직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선거 자금을 주무른 재단 핵심 간부는 사업비와 포상금을 개인 사택 가구류 및 사치품 구매, 심지어 자녀 결혼식 비용으로까지 탕진했다.
임원과 조합장들에게는 수당, 상조비, '황금 열쇠' 등을 쥐여주며 돈잔치를 벌였다. 지출 항목조차 사전에 정해두지 않은 '유보 예산'이 중앙회 전체 예산의 60%에 달한다는 사실은 농협의 씀씀이가 얼마나 주먹구구식인지 방증한다. 타 협동조합 대비 기형적으로 높은 퇴직금 잔치와 초호화 사택 제공 등 '그들만의 리그'는 굳건했다.
분식회계와 셀프 징계, 썩어 들어간 지역 조합
중앙회의 기강이 흔들리자 지역 회원 조합의 통제력도 완전히 상실됐다. 비위 의혹이 제기된 12개 회원 조합을 감사한 결과, 일부 조합은 부실한 재정을 숨기려 분식회계를 저질렀다.
서류상으로 조작된 가짜 이익을 바탕으로 배당금까지 챙기기까지 했다. 조합장이 자신의 비위를 심의하는 징계위원회에 직접 참석해 '셀프 징계'를 내린 사례도 적발됐다.
업무와 무관한 심야 시간이나 휴일에 법인카드를 긁고, 공금으로 지인 선물을 사는 행태는 일상이었다. 밉보인 특정 조합원을 근거 없이 반복적으로 제명하며 권익을 짓밟는 무소불위의 권력 남용도 만연했다.
눈 감은 감시자들, 내부 통제 시스템의 붕괴
이토록 광범위하고 대범한 부패가 가능했던 이유는 내부 통제 시스템이 철저히 망가졌기 때문이다. 준법 감시인의 자격 요건을 '중앙회 등 10년 이상 경력자'로 제한해 철저히 '제 식구 감싸기' 환경을 조성했다.
감사위원 다수는 전직 조합장으로 채워져 날카로운 감시의 눈은 애초에 기대하기 어려웠다. 사내 전용 온라인샵을 악용해 수의계약 금지 규정을 우회하거나 퇴직자 단체가 출자한 영리 법인이 15년 동안 농협 건물을 무단으로 무상 사용하는 등 특혜성 계약도 꼬리를 물었다. 감시자가 스스로 눈을 가린 사이 조직은 병들어갔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는 '회장 잔혹사'
농협의 '회장 잔혹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988년 민선 방식이 도입된 이후 역대 회장 7명 중 5명이 중도 하차했고 그중 3명이 임기 중 구속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사법당국이 강 회장의 주변인들로 수사 전선을 넓히면서 강 회장 역시 이 잔혹사의 궤도에 오르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쏟아진다.
올해 초 대국민 사과와 함께 측근 퇴진을 약속하며 강도 높은 인적 쇄신을 천명했지만 굳건한 '인의 장막'이 걷힐지는 미지수다. 사법부의 최종 판단 이전에 주무 부처인 농식품부의 징계 칼날이 먼저 날아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잃어버린 농민의 신뢰, 환골탈태 없이는 미래도 없다
정부는 이번 감사를 통해 위법 소지가 짙은 14건에 대해 수사를 의뢰하고 96건의 제도 개선 처분을 내렸다.
하지만 꼬리 자르기식 처벌만으로는 부족하다. 금품에 취약한 선거 제도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고, 폐쇄적인 지배구조를 투명하게 개방하는 대수술이 시급하다.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가 짙다는 말로 넘어가서는 안 될 일들이 벌어졌다. 800조 원이라는 거대한 자본의 무게는 농민의 피와 땀에서 비롯된 것이다. 썩은 뿌리를 도려내는 뼈를 깎는 쇄신만이 농민의 신뢰를 되찾고 '농민 대통령'의 진정한 권위를 바로 세우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