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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윤 소설가의 유리정원] 불탄공장 2회
  • 박정윤 소설가
  • 등록 2025-04-12 0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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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가 무엇인지 몰랐다. 765KV의 고전압이 철탑 29호에 송전 되던 순간, 최초의 더미가 강력한 전파에 의해 끌어당겨졌고, 자석에 쇳가루가 반응하듯 우리는 서로 들러붙었다.

흩어져 있던 것. 미생물처럼, 균처럼 떠돌다 스며들고 붙었다. 고여있는 물 위에 드리운 그림자 같고, 바람이 스친 흔적 같은 것. 비가 내리면 우리 중 대여섯, 혹은 열하나, 스물이 물웅덩이에 적셔졌다가 햇빛에 바싹 말라 바람에 흩어졌다. 돌에 붙어 굴러다니다 흙에 스며들었다. 철탑에 붙었다, 쇠붙이에 붙었다, 벽 틈에 스며들었다. 

우리는 겹겹이 뒤엉켰고, 형체 없는 서로의 내부, 혹은 외부에 붙었다 다시 갈라졌다. 우리는 희미했다. 알 수 있었다. 혼이라도 온전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의 깊은 곳으로 스며들어 기억과 공포를 파헤쳤다. 한때는 물고기였다. 물고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분홍 털실을 굴리던 고양이었고, 도축된 소였다. 야생동물 보호구역 소로를 가로지르던 고라니였고 뺑소니 차에 치인 자였다. 어느 소녀의 잘린 팔에 간신히 붙어 있다 떨어졌고, 스스로 저수지로 걸어 들어간 사내의 넋이었고, 불탄 공장의 기억을 가진 전기 배선공이었다. 우리에겐 장례의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짐작했다. 위령(慰靈) 받지 못한 버려진 존재, 혹은 비존재. 비교적 기억을 많이 기억하는 쇳가루였고, 끈적한 액체였고 헐거운 고체였다. 부패의 과정에서, 유골 상태에서, 자연과 분간되지 않을 때까지 뒤섞이는 과정에서 우리는 흘렀다. 배신과 협잡의 기억, 공포와 슬픔이 닳고 닳을 때까지 떠돌았다. 그러다 철탑 29호 아래 최초의 더미에 빨려들었다. 


우리는 벌판에서 더미로 나뉘어 이리저리 휩쓸려 다녔다. 눈을 뭉쳐놓으면 녹기 전까지 단단한 힘이 생기듯, 수많은 우리가 엉켜 들면 찰나 약간의 힘이 생겼다. 미약한 힘으로 전선에 매달렸고 바람을 솟구치게 했고 누군가의 목덜미를 스쳐 소름 돋는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누군가의 구두 굽에 매달려 열흘을 지내다 오면 우리는 구두 주인에 대해 사소한 습관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사라지지도 않았다. 인부의 모자에 묻어 공단 골목 주먹고기 집에 갔던 더미들은 인부가 모자 먼지를 털어낼 때 숯불 위로 떨어졌지만, 검은 잿더미와 휩쓸려 지내다 어느결에 이곳으로 돌아왔다. 누군가의 입속으로 무심코 들어갔던 더미는 몸속의 장기를 떠돌다 악취 나는 하수구를 관통해 거대한 물에 합류했다가 되돌아왔다. 우리는 기억을 흡수해 천문학적으로 부풀어 난 기억, 오래된 사건과 험악한 비밀을 품고 떠돌았다.


벌판에는 컨테이너와 양철 슬레이트 창고로 골목처럼 길이 생겼다. 컨테이너와 양철판에는 아라비아 숫자가 적혀 있다. 주거는 불법이었고 적재 공간으로 대부분 쓸모없어 방치한 물건이 쌓여있다. 페인트칠하지 않은 양철판에는 슬레이트 골을 따라 녹물이 흘러 붉은 쇳물 자국이 선명했다. 구두공장 소유 슬레이트 뒤에는 구두 굽을 잘라내고 남은 검은 우레탄 조각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창고 용도인 컨테이너에는 공공 주택 입주권을 받지 못했거나 취업 활동이 끝난 불법체류자들, 미등록체류자들이 자리 잡았다. 

녹이 슬고 녹색 칠이 벗겨진 컨테이너에 깨우와 친구들이 살았다. 깨우의 친구들은 공단 지대 번화가 골목에 있는 마사지 숍, 술집과 노래방에 다녔다. 낮에는 모텔촌으로 가 객실을 청소했다. 

우리는 깨우가 처음 벌판에 오던 날을 기억했다. 무더운 날이었다. 더위로 고압 전선 그림자가 늘어졌고 슬레이트 근처에 고인 폐수에는 부화하자마자 더위로 기절한 모기떼로 새카맸다. 흰색 긴 드레스를 입은 깨우는 낡은 트렁크를 끌고 벌판으로 왔다. 바퀴가 벌판의 흙을 긁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머리와 목을 휘감아도 여유롭게 남은 청록색 머플러가 가느다란 몸피를 따라 흘러내렸다. 

깨우는 도착한 날, 녹색 컨테이너 옆 흙을 다지고 물을 뿌린 후 레몬 향이 나는 풀을 심었다. 옆에서 팔짱을 낀 그녀의 친구들이 레몬그라스, 똠얌꿍, 깨우 브라보, 라 말하며 소란스럽게 떠들었다.

깨우는 미등록체류자였다. 친구 방문과 관광 목적으로 90일 체류 비자를 받고 왔지만, 처음부터 돈을 벌 결심으로 온 거였다. 그녀는 벌판에 도착한 다음 날, 친구의 소개로 태양 인력 사무실로 가 파견 근무 계약서를 작성했다. 이틀째부터 벌판 입구에서 승합차를 타고 모텔촌 세탁실로 갔다. 우리는 그녀의 드레스 자락에 올라타 따라다녔다. 

일은 단순했다. 몇 가지 규칙에 따라 정해진 순서대로 하면 되었다. 대형 기계에 분류해 넣으면 세탁과 건조까지 저절로 해결되었다. 모텔 이름이 적힌 대형 박스에 침대 시트, 이불 홑청, 베개 커버, 수건 등 종류별로 개켜 차곡차곡 담았다. 세탁하는 동안, 건조된 침대 시트와 이불 홑청을 다림질했다. 간혹 얼룩이 심한 세탁물은 독한 세제에 담가 솔로 문질러 지웠다. 여러 대의 세탁기와 건조기를 동시에 돌려 기계 열로 빗물처럼 땀이 흘렀지만, 더위에는 익숙한 그녀였다. 무엇보다 저녁 6시 정각에 대기 중인 승합차에 올라타면 김 실장이라는 남자가 일당을 줬다. 깨우는 놀란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고국에서 받던 일당의 5배는 넘었다. 그녀는 오만 원권 지폐를 무릎 위에 펼쳐놓고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이런 식으로 1년, 아니 3년만 벌 수 있다면. 일주일 후 깨우는 김 실장에게 은행 업무 대행 수수료를 지급하고 고국의 친정엄마에게 돈을 보냈다. 

여름이 끝나기도 전에 깨우는 일당이 더 많고 야간근무수당도 지급한다는 서원산업으로 파견 근무를 갔다. 


덧붙이는 글

박정윤 소설가는 강원도 강릉 출생이며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에 《강원일보》 신춘문예, 「바다의 벽」으로 당선된 뒤 2005년에 「길은 생선 내장처럼 구불거린다」로 《작가세계》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프린세스 바리』로 제2회 혼불문학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프린세스 바리』, 『목공소녀』, 『연애독본』, 『나혜석 , 운명의 캉캉』, 『꿈해몽사전』 등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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