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회장이 2026년 3월 10일 '2026 가치와 성장 포럼'에서 '사회적 가치 경영'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사회적가치연구원 제공)
"돈만으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대한민국 재계 서열 2위, SK그룹을 이끄는 최태원 회장의 입에서 나온 이 한마디는 단순한 기업가의 윤리적 수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전통적 자본주의의 맹점을 꿰뚫는 날카로운 통찰이자 생존을 위한 절박한 외침에 가까웠다.
국가는 부유해졌지만 청년들은 여전히 현실을 고통스러워한다. 정부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길 바라기에는 현대 사회의 문제가 너무나 복잡하고 다각도로 얽혀 있다.
결국 기업이 직접 나서야 했다. 이윤 추구라는 맹목적인 질주를 멈추고, 사회와 공존하며 새로운 성장의 공식을 찾아야 했다. 최 회장의 '사회적 가치(SV)' 경영은 그렇게 치열한 고민 속에서 닻을 올렸다.
GDP 신화의 붕괴, '순성장' 향한 패러다임 전환
2026년 3월 10일, 서울 한국고등교육재단에서 열린 '2026 가치와 성장 포럼'. 최태원 회장의 진단은 단호했다. 한국 경제가 직면한 현실은 일시적인 성장 둔화가 아니라 내수가 말라붙고 양극화와 환경 오염 같은 사회적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구조적 함정'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GDP 증가만을 성장의 유일한 잣대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일부만 배를 불리고 사회문제가 방치된다면, 결국 그 갈등과 복지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경제성장 자체를 옭아매는 끔찍한 악순환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최 회장은 기존 GDP 지표의 뚜렷한 한계를 명확히 꼬집으며 사회적 가치와 환경 가치까지 온전히 포괄하는 새로운 성장 지표의 도입을 강하게 촉구했다. 성장의 궁극적인 목표가 단순한 물량 생산의 확대를 넘어, 국민의 삶의 질 향상과 사회문제 해결까지 확장되어야 한다는 묵직한 화두를 우리 사회에 던진 것이다.
10년의 고독한 실험, 숫자로 증명된 '가치의 힘'
선의는 막연한 구호가 아니라 숫자로 증명될 때 비로소 거대한 힘을 얻는다. 최 회장은 2013년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에서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사회적 기업이 땀 흘려 해결한 사회 문제의 크기를 정밀한 화폐 가치로 측정하고 그 성과에 비례해 현금 인센티브를 주자는 '사회성과인센티브(SPC)' 개념이었다.
당시만 해도 많은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착한 일을 어떻게 돈으로 환산하느냐는 회의론이 팽배했다.
10년이 흐른 지금, 그 실험은 경이로운 성적표를 당당히 받아 들었다. 지난 10년 동안 무려 468개의 기업이 SPC 프로젝트에 참여해 5364억 원 규모의 막대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해냈다. 이에 비례해 SK는 약 769억 원의 현금 인센티브를 아낌없이 지급했다.
상암월드컵경기장·고척 스카이돔 짓고도 남는 5000억의 기적
최 회장은 이 5000억 원이라는 숫자가 지닌 파급력에 대해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과 고척 스카이돔을 다 짓고도 1000억 원이 남는 돈"이라고 했다.
수혜의 폭은 더욱 넓다. SPC 기업들이 창출한 고용 효과만 2200억 원에 달한다. 이는 최저임금 기준으로 8900여 근로자들이 1년간 피땀 흘려 벌 수 있는 돈과 맞먹는다. 수많은 취약 계층에게 실질적인 일자리와 교육의 기회가 직접적으로 돌아간 것이다.
SPC는 단순한 시혜성 지원금 제도가 아니라 기업을 역동적으로 성장시키는 핵심 촉매제 역할을 해낸 셈이다. 자신의 노력에 대해 현금 인센티브를 받은 기업은 그렇지 못한 기업보다 사회적 성과를 약 3배나 더 폭발적으로 창출했다.
착한 기업이 돈도 잘 번다…산산조각 난 시장의 편견
경제적 성과 역시 압도적이었다. SPC에 참여한 기업들은 미참여 기업 대비 평균 34%나 높은 매출을 기록하며 시장을 놀라게 했다. 사회적 가치 창출이 일방적인 비용이라는 해묵은 편견을 깨고 퀀텀점프를 위한 든든한 자산이 될 수 있음을 입증한 것이다.
게다가 SPC 참여 이력 자체는 깐깐한 금융 기관들에게 해당 기업이 높은 재무적 안정성과 장기적 성과를 거둘 것이라는 매력적인 신호로 작용해 외부 자본을 조달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정부의 보조금 방식과 비교해도 결과는 명확했다. 성과에 비례해 사후 보상하는 SPC 방식이 고용과 생산 유발 측면에서 1.5배에서 2배 높은 압도적인 파급 효과를 보였다. 10년 동안 그럴싸한 이론이 아닌 차가운 실제 데이터로 '사회적 가치를 만드는 것이 곧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길'임을 증명한 셈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21일 도쿄포럼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SK 제공)
AI를 만난 자본주의, 'ESG 측정 혁명'의 거대한 서막
최 회장의 혁신을 향한 발걸음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25년 11월 일본 도쿄대에서 열린 '도쿄포럼 2025'. 그는 인공지능(AI) 기술이라는 가장 현대적이고 강력한 무기를 치켜들며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전환을 역설했다.
과거에는 사회적 가치가 추상적이어서 이를 정량화하는 데 데이터 수집, 인과관계 분석 등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됐다.
이제는 눈부시게 발전한 디지털 기술과 AI가 그 철벽같던 한계를 부수고 측정의 거래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췄다. 실시간 데이터 분석을 통해 기업의 탄소 배출, 일자리 창출, 지역사회 기여도 등을 종합적이고 정밀하게 평가할 수 있는 진정한 '측정 혁명'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AI는 방대한 글로벌 공급망 데이터를 샅샅이 추적해 인권 침해나 환경 오염 리스크를 사전에 예리하게 감지해 낸다. 똑똑한 머신러닝 알고리즘은 측정 방법론을 스스로 학습하며 지속적으로 진화시키고, 산업과 지역 특성에 딱 맞는 맞춤형 지표까지 속속 만들어내고 있다.
측정하면 행동이 바뀐다…뼛속까지 바꾼 SK의 'DBL경영'
"측정이 시작되면 의사결정의 기준이 완전히 바뀐다."
최 회장의 이 지론은 SK그룹 내부에 DNA로 이식돼 있다. SK는 2018년부터 '더블 보텀 라인(DBL)' 경영을 전면 도입해 재무적인 경제적 가치와 이타적인 사회적 가치를 혹독하게 동시에 쫓고 있다.
각 계열사는 일자리 창출부터 납세, 환경 영향까지 철저하게 해부당하듯 평가받는다. 긍정적 영향은 플러스로, 부정적 영향은 마이너스로 냉정하게 계산해 '순 사회적 가치'를 뽑아낸다.
임원들의 성과 평가(KPI)에도 이 실적이 고스란히 꽂힌다. 환경 오염을 줄이거나 취약계층 고용을 늘리면 두둑한 보상을 받고 사회적 가치를 훼손하면 가차 없이 페널티가 부과된다. 당장 눈앞의 단기 수익이 조금 낮아 보이더라도 장기적으로 사회적 가치가 더 큰 사업에 과감히 자원을 쏟아붓는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역동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시장 논리로 작동하는 지속가능한 미래 연대
이제 최 회장의 거대한 비전은 개별 기업의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어 글로벌 시장과 거시적인 국가 시스템 전체를 향해 뻗어가고 있다. 선의나 윤리에 기대는 위태로운 자선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 창출 자체가 당당하게 경제적 보상으로 이어지는 시스템적 인센티브 구조를 촘촘히 설계하자는 것이다.
유럽연합(EU)이 녹색 분류 체계(Taxonomy)를 통해 지속가능한 프로젝트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집중적으로 몰아주고 있는 것처럼, 가치가 명확하게 측정되면 이를 담보로 저금리 대출, 파격적인 세제 혜택, 공공 조달 우대 등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금융 및 제도적 상품이 탄생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그는 각개전투하는 개별 기업의 고군분투를 넘어 사회적 기업들이 거대한 스크럼을 짜듯 연대해 '집합적 영향력'을 강력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에 나석권 사회적가치연구원 대표는 "가치가 성장의 조건이 될 수 있는지, 그것이 말이 아니라 제도와 구조로 작동시킬 정부와 시장의 만남이 필요하다"며 지금이 어느 때보다 사회적 가치 창출이 절실하다고 한다.
정책과 기업의 앙상블, 경제성장의 새 심장을 뛰게 하라
이러한 기업가들의 절박한 외침에 정부도 마침내 화답하기 시작했다. '2026년 가치와 성장 포럼'에 참석한 윤호중 행정안전부 장관은 "사회문제 해결과 경제성장을 동시에 거머쥐기 위해 정부 정책과 민간 혁신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새로운 성장 생태계가 필요하다"며 사회연대경제 기본법 제정을 추진하고 금융 지원을 대폭 확대하겠다고 약속했다.
"사회 문제가 전혀 없는 완벽한 세상을 후손에게 물려주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문제 해결 속도가 발생 속도보다 빠르다면 언젠가는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최태원 회장의 신념은 단단하다. 골치 아픈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낯선 새로운 시장이 활짝 열리고 죽어가던 내수가 다시 살아나는 거대한 선순환을 믿는 것이다. 10년 집념으로 그의 '자본주의 2.0'이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배를 저성장의 늪에서 건너게 할 동력이 될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