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구가 윤석열 탄핵 심판 선고일 등을 고려해 여의도 봄꽃행사를 4월 8~12일로 나흘 연기했다(영등포구청 제공)
홍수가 나면 머리만 살짝 내밀던 모래톱이었다. 사람들은 그 위태로운 땅을 가리켜 '나의 섬', '너의 섬'이라 불렀다. 양말산이라 불리던 그 볼품없던 땅은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한자로 음차되어 지금의 '여의도(汝矣島)'가 됐다.
1968년 윤중제 공사 이후 척박했던 모래섬은 상업과 금융, 주거의 중심지로 상전벽해했다. 그리고 매년 4월이면 이 빌딩숲을 둘러싼 1.7km의 여의서로(옛 윤중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화려한 꽃대궐로 변모한다. 여의도 봄꽃축제다.
모래섬에서 금융의 중심으로 굴곡진 역사 품은 여의도
여의도는 영등포구 면적의 34.5%를 차지하는 하중도다. 1970년 서울대교, 1981년 원효대교가 차례로 개통되며 여의도는 서울의 심장부로 자리 잡았다.
차가운 잿빛 빌딩이 숲을 이룬 이곳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단연 한강을 따라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벚꽃이다. 간판과 전봇대가 어지럽게 엉킨 도심의 일반 벚꽃길과 달리 탁 트인 한강을 배경으로 핀 여의도의 벚꽃은 압도적인 시각적 쾌감을 선사한다. 이 눈부신 풍경 이면에는 우리 민족의 쓰라린 상흔이 서려 있다.
창경궁의 눈물 머금은 벚나무, 윤중로에 뿌리를 내리다
여의도 일대를 뒤덮은 벚나무의 고향은 다름 아닌 조선의 궁궐, 창경궁이다. 일제는 왕실의 권위를 짓밟기 위해 창경궁을 동물원과 식물원(창경원)으로 전락시키고 그곳에 일본의 국화인 벚나무를 대거 심었다.
해방 후에도 오랜 시간 창경원에 머물던 벚나무들은 1981년 궁궐 복원 사업이 시작되면서 비로소 여의도로 옮겨졌다. 지금 우리가 감탄하며 바라보는 여의도의 거대한 벚나무들은 나라를 잃었던 뼈아픈 시대의 목격자이자 식민의 잔재에서 시민의 휴식처로 승화된 역사의 산물인 셈이다.
'벚꽃' 지우고 '봄꽃'으로, 주체성을 되찾은 봄의 제전
여의도 벚꽃길의 역사는 오래됐지만 공식적인 축제는 2005년에야 첫발을 내디뎠다. 흥미로운 점은 축제의 명칭 변화다. 시작 당시 '벚꽃축제'였던 이름은 2007년 '봄꽃축제'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여의도 벚나무가 일제 식민지화의 상징인 창경궁에서 유래했다는 껄끄러운 역사적 배경 때문이었다.
영등포구는 명칭 변경과 함께 한강 둘레길에 제주도 원산지의 왕벚나무를 비롯해 진달래, 개나리, 철쭉, 조팝나무 등 다채로운 우리 꽃을 심었다. 특정 국가의 꽃을 찬양하는 행사가 아닌 진정한 한국의 봄을 알리는 주체적인 문화 축제로 거듭나기 위한 결단이었다.
시대의 격랑 속 연기된 축제, 화려함 대신 차분함 택해
진해 군항제와 쌍벽을 이루며 2017년부터 3년 연속 축제관광 부문 대상을 휩쓴 명실상부 국내 최고 봄꽃축제지만 올해는 시대적 상황에 맞춰 몸을 한껏 낮췄다. 영등포구는 4월 4일로 예정된 탄핵심판 선고 등 대규모 집회 가능성을 고려해 축제 일정을 4월 8일부터 12일까지로 나흘 연기했다.
국가적 중대 사안이 겹친 만큼 개막식을 과감히 취소하고 공군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스의 축하 비행 등 대규모 이벤트도 모두 백지화했다. 축제의 덩치를 키우기보다 봄꽃 개화 시기에 맞춰 방문하는 시민들을 위해 최소한의 문화행사만 소규모로 진행하며 내실을 다지기로 한 것이다.
AI 드론과 3중 모니터링, 시민 안전 최우선 한강 나들이
행사 규모는 줄었지만 안전 관리만큼은 역대 최고 수준으로 강화됐다. 국회 뒤편 여의서로 1.7km 구간과 서강대교 남단 공영주차장에서 여의 하류IC 구간은 4일 6일 정오부터 13일 밤 10시까지 전면 통제된다.
올해는 첨단 기술이 축제의 수호자로 나선다. AI 기반 드론과 지능형 CCTV가 공중과 지상에서 인파 밀집도를 실시간으로 분석한다.
경찰, 소방, 공무원, 자원봉사자가 촘촘히 배치된 가운데 인파 감지 시 즉각적인 음성 안내방송이 송출되며 재난안전상황실-관제센터-소방상황실이 연계된 3중 모니터링 시스템이 가동된다. "어떤 변수에도 시민 안전이 우선"이라는 최호권 구청장의 선언이 축제 현장 곳곳에 스며있다.
가장 아름다운 한강의 봄, 성숙한 시민의식이 완성할 때
시민 편의도 대폭 확충됐다. 간이화장실 12개소가 곳곳에 설치됐고 의료 상황실과 아기 쉼터 등 남녀노소 누구나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인프라를 꼼꼼히 갖췄다.
축제를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은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의 몫이다. 매년 엄청난 인파가 몰리는 만큼 쓰레기 무단 투기와 한강공원 내 불법 텐트 문제는 여전히 과제다. 규정상 텐트의 4면 중 2면을 반드시 개방해야 하지만 이를 무시하는 얌체 상춘객들이 공원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주최 측의 철저한 안전 관리와 더불어 기초질서를 지키고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 성숙하고 자발적인 시민의식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영등포 여의도 봄꽃축제는 진정한 의미의 '봄의 제전'으로 만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