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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윤 소설가의 유리정원' [연재소설[ 기차가 지나간다 4회
  • 박정윤
  • 등록 2024-11-30 00:00:07
  • 수정 2024-11-30 22:3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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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기차가 지나간다 4회

박정윤 소설가 


파란 대문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목발을 짚고 나온 청년이 들어오라고 했다. 


“아줌마는?” 

“없어. 조금 있으면 올 거야. 들어와서 기다려.” 


그는 기타를 옆으로 밀어 놓고 앉으라는 신호로 손바닥으로 평상을 쳤다. 나는 감나무 밑에 섰다. 


“여기서 기다릴 거야.” 


청년은 목발을 평상 옆에 기대 세워 놓으려 하다가 목발을 내 앞으로 들이밀었다. 


“너 이거 가지고 놀고 싶니?” 


나는 감나무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들어 절의 처마 끝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청년이 거칠게 목발을 내동댕이쳤다. 오른 발에서 양말을 벗고 자주색 체육복 바지를 걷기 시작했다. 나는 안 보는 척하며 쳐다보았다. 그는 바지를 엉덩이 아래까지 돌돌 말아 올렸다. 살보다 더 하얀 플라스틱 다리가 허벅지에서부터 발끝까지 일자로 연결되었다. 내가 놀라 입을 벌린 채 쳐다보자 그는 만족한 듯 웃으며 다른 쪽 바지도 걷어 올렸다. 


“무섭지?”

“아니.” 


나는 털과 땀구멍이 없는 플라스틱 다리를 쏘아보았다. 만져보고 싶은 충동과 두려움이 조금 있었지만 애써 외면하고 처마 끝에 걸린 풍경을 쳐다보았다. 그는 플라스틱 다리 윗부분을 벅벅 긁었다. 나는 감나무에 등을 기대고 선채로 청년의 플라스틱 다리를 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손으로 알머리를 쓰다듬으며 수줍게 웃었다. 돌돌 말린 바지를 천천히 내리고 무지개 색깔로 줄이 쳐진 양말을 플라스틱 발에 끼웠다. 


“저어, 부탁이 있어. 이거 받아.” 


그는 노래책 밑에서 상자를 꺼내 내게 건넸다. 나는 감나무에 등을 기댄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괴팍한 낌새가 없이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어찌 보니 슬퍼 보이기까지 했다. 깎아 놓은 배 같은 머리 한 부분을 꾹 누르면 눈에서 흰 즙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나는 감나무에서 등을 떼곤 상자를 받았다.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는 향이 짙은 초콜릿이 들어 있었다. 초콜릿은 겨우 세 개가 남아 있었다. 검은 레이스 모양으로 접힌 종이를 벗기자 꽃 모양으로 생긴 초콜릿 한 잎마다에 영어가 씌어 있었다. 초콜릿을 하나 들어 입 안에 넣었다. 초콜릿은 넣자마자 스륵, 녹아 버렸다. 초콜릿은 예상했던 것만큼 달달하진 않았고 씁쓸했다. 나는 남은 초콜릿 두 개를 종이에 싸서 가방 안에 넣었다.


“초콜릿을 먹었으니 부탁을 들어줘.” 


청년은 목발을 짚고 현관 앞으로 가 신발장에서 고무줄을 가지고 왔다. 


“이걸 감나무에 연결해.” 


나는 검은 고무줄을 받아 감나무에 연결했다. 


“연결했어.” 


청년은 한쪽 고무줄을 평상의 다리에 묶었다. 그리고 기타를 들고 책을 넘겼다. 


“내가 기타를 쳐줄게. 너는 고무줄을 타 넘어. 아, 네 바지를 걷고.” 


나는 할머니가 청색 실로 짜준 쫄쫄이 바지와 내복을 종아리까지 걷고 고무줄 앞에 섰다. 청년은 알아들을 수 없는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기인 머리 짧은 치마, 아름다운 그녀를 보면.”


나는 고무줄넘기를 잘 못하지만 그냥 톡톡 뛰어넘었다. 기타 반주와 노래는 고무줄을 넘기에는 어울리지 않고 박자 맞추기가 힘들었다. 나는 박자에 상관하지 않고 고무줄을 뛰어넘었다. 다리를 엇갈리게 해서 고무줄을 밟기도 했다. 점점 노래 소리가 커졌다.


“토요일 밤, 토요일 밤에 나 그대를 만나리.” 


그러다 청년은 노래는 부르지 않고 기타만 튕기면서 내 다리를 쳐다보았다. 나는 더 높이 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폴짝폴짝 뛰었다. 누가 먼저 웃기 시작했는지 우리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기적 소리가 나자 청년이 목발을 짚고 평상 위로 올라섰다. 나도 평상으로 올라갔다. 굴다리 위로 기차가 지나갔다. 청년이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기차 안에서 누군가 손을 흔들어주었다. 


“기차 타고 멀리 가고 싶어.”


나는 아버지가 역에서 일하기 때문에 공짜로 기차를 탈 수 있으니깐 언젠가 기차를 태워주겠다고 말했다. 청년이 배를 잡고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내 앞에서 몸을 수그리고 웃던 청년이 웃음을 딱 멈추고 말했다.


“네 다리 한 번만 만져 보면 안 돼?”


나는 한쪽 다리를 청년 앞으로 내밀었다. 청년은 평상 위에 서 있는 내 앞에 앉았다. 그는 뜨뜻해진 손으로 다리를 만져 보곤 살짝 꼬집었다.


“아퍼?”

“아니.”


그는 자신의 바지를 걷어 다리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나는 평상에서 내려와 청년 앞에 꼬부리고 앉아 플라스틱 다리를 쓰다듬었다. 미끈미끈한 다리는 차갑게 느껴졌다. 나는 다리를 찰싹, 때렸다. 


“아퍼?”

“아니.”


우리는 또 웃기 시작했다. 나는 가방 안에서 물감을 꺼내 자랑했다. 청년은 내가 물감을 한 개씩 꺼내 냄새를 맡는 것을 보았다. 


“다리에 색칠해 줄까?”


나는 청년의 다리를 만지며 말했다. 청년은 말없이 있다가 빨간색 물감을 꺼내 들었다. 나처럼 물감의 뚜껑을 돌려 열곤 냄새를 맡아보곤 나에게 내밀었다. 


“빨간색은 쓰면 안 돼. 노란색이 예뻐.”


나는 수돗가에서 물을 떠왔다. 노란색 물감의 튜브 끝을 밀어 손가락에 물감을 덜었다. 손바닥에 물을 붓고 손가락에 던 물감을 비벼 청년의 다리에 발랐다. 허벅지 즈음에 올라갔을 때, 청년이 몸을 비틀며 웃기 시작했다. 양쪽 다리를 노랗게 색칠하니 물감은 반 넘게 줄어들었다. 난 물감이 아까워 물을 더 많이 섞었다. 청년은 물감이 잘 마르도록 평상에 엉덩이만 걸치고 앉았다. 나는 얼룩덜룩 색칠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빨간 물감을 꺼내 뚜껑을 열고 연필 끝에 물감을 묻혀 청년의 다리에 꽃을 그려 넣고 있을 때, 파란 대문의 자물쇠가 저절로 제꺽 돌아가는 소리가 났고, 이내 문이 열렸다.

나는 엄마가 시킨 대로 아버지 이름을 말하고 엄마가 이리 오기 전에 나와 함께 할머니 집으로 가자고, 만약 안 간다면 나도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고 말했다. 여자는 한숨을 쉬곤 내 뒤를 따라 나왔다. 대문을 나설 때, 청년이 나를 불러 세웠다. 


“야, 이제 너 안 오냐?” 


허벅지까지 돌돌 말린 자주색 체육복을 양손으로 붙잡고 엉거주춤 평상 끝에 앉아 있는 청년의 노랗게 칠해진 다리가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여자는 대문을 닫고 밖에서 문을 걸었다. 대문 안에서 신경질적으로 기타 줄을 뜯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끔 뒤를 돌아 여자가 따라오는지 확인하며 걸었다. 부러 시장을 한 바퀴 천천히 돌아 집으로 갔다. 골목 입구에서 여자는 잠깐 쉬어 가자며 숨을 가다듬었다. 나는 여자에게 상점에서 박카스를 사서 마시자고 말했다. 여자가 상점으로 들어갔다가 박카스를 두 병 사가지고 와서 나에게 한 병 주었다. 

엄마는 우리를 공부방으로 보내고 여자와 할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선아 언니는 라디오를 켜 놓고 공책에 가사를 받아 적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할머니방의 문틈을 들여다보았다. 할머니가 여자의 머리와 얼굴을 사정없이 때렸다. 


“누굴 바보로 여겨. 제 병신 아들을 내 손자라고 속이려 들어.”


여자는 말없이 맞기만 했다. 여자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만지며 마당을 나서자 엄마가 나를 불렀다. 


“강아, 너. 앞으로 그 집에 얼씬도 하지 마, 가서 공부해라.”


방학식을 마치자마자 나는 시장 쪽으로 갔다. 머리가 헝클어진 여자가 굴다리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나는 여자 옆 벽에 기대서서 여자를 바라보았다. 겹겹이 옷을 껴입은 여자는 체크무늬 담요로 몸을 둘둘 말고 꾸벅 졸았다. 잠시 후, 굴다리 위로 기차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기차는 굴다리 앞에서 기적을 내며 쿵쾅거리며 지나가는 중이었다. 머리 바로 위에서 들리는 소리는 심장을 치고 몸을 떨게 만들었다. 졸던 여자가 머리를 들고 굴다리 천장을 쳐다보며 기차를 향해 악담을 퍼부었다. 나는 굴다리를 빠져나와 파란 대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너구나. 그동안 왜 안 왔어?”


나는 말없이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감나무와 평상에 연결된 고무줄이 보였다. 청년은 평상에 앉아 조심스럽게 바지를 걷어 올려 노랗게 얼룩진 다리를 보여 주었다. 꽃을 그리다 만 붉은 물감이 피처럼 번져 있었다. 

청년과 나는 살림 놀이를 했다. 그는 기차 기관사를 했고, 나는 양장점을 했다. 그와 나는 만나는 일 없이 따로 살았다. 가끔 나는 목발 두 개를 나란히 놓아 만든 그의 기차를 탔다. 그는 열차 사고로 죽겠다고 했고 나는 바늘에 찔려 죽겠다고 했다. 그는 바늘에 백 번 찔려도 죽지 않는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우린 같은 기차 안에서 죽었다. 청년이 절룩거리며 방에서 빨간색과 녹색이 반씩 섞인 이불을 꺼내왔다. 그는 원앙금침 이불이라며 무덤 속에 같이 들어가자고 했다. 우리는 평상 위에 이불을 깔고 함께 이불 속에 웅크렸다. 무겁고 푹신한 무덤 속은 더웠다. 청년이 자꾸 손으로 내 얼굴을 만졌다. 나는 죽었으니깐 움직이지 말고 속으로 숫자를 세라고 했다. 청년이 머리를 움직이다 내 이마에 입술이 닿았다. 나는 속으로 세던 숫자를 까먹었다. 내 이마에 뜨듯한 기운이 점점 번질 때, 대문이 열렸다.

여자는 나에게 다신 이 집에 오지 말라며 내 어깨를 대문 쪽으로 밀었다. 닫힌 대문 안 쪽에서 여자와 청년의 말다툼 소리가 들렸고,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 다음주 토요일에 최종회가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박정윤 소설가는 강원도 강릉 출생이며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에 《강원일보》 신춘문예, 「바다의 벽」으로 당선된 뒤 2005년에 「길은 생선 내장처럼 구불거린다」로 《작가세계》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프린세스 바리』로 제2회 혼불문학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프린세스 바리』, 『목공소녀』, 『연애독본』, 『나혜석 , 운명의 캉캉』, 『꿈해몽사전』 등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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