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 강은교 시인의 시 '우리가 물이 되어' 전문
이 시는 강은교 시인의 시집 《풀잎》에 실려있다. 1974년에 초판을 찍고 강산이 여러 번 지난 지금 읽어도 여전히 좋다.
가문 세상에 비가 내리면 반가운 일이다. 키 큰 나무도, 조그만 꽃들도, 부지런한 사람들도 모두 기다렸을 것이다. 그렇게 "물"로 만나 낮은 곳으로 흐르고 흘러 저 혼자 깊어가는 강물도 만나서 다같이 가는 길에 죽어가는 나무뿌리도 적시고, 상처 받고 소외된 존재들도 보듬으며 넓은 바다에 닿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 8장에 '상선약수(上善若水)' 라는 사자성어가 나온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물기 때문에 도에 가깝다'는 의미다. 이런 "물"로 만나면 괜찮은데 우리 현실은 그렇지 않다. "불"로 만나 경쟁하고 부딪히며 서로를 태우게 된다. 결국은 상대를 태우면서 커지는 에너지로 "숯이 된 뼈"가 되곤 한다. 그것은 깊은 상흔을 남긴다.
하지만 여러 번 경험했던 그 "뼈"를 보며 화자는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고 한다. 그때는 "넓고 깨끗한 하늘"에서 억지로 상대를 바꾸려 하지 말고 서로를 이해하며 자연스럽게 흐르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물"과 "불"이라는 두 원소의 대비를 통해 우리 사회가 어떻게 공존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감각적이고 역동적으로 표현한 시라 할 수 있다.
어향숙 시인
어향숙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김유정 신인문학상'(2016)을 받았다. 시집으로 《낯선 위로가 눈물을 닦아주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