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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영화 속 먹먹한 재판 풍경이 현실이 된 최후변론
  • 손병걸 시인
  • 등록 2025-02-27 07:17:33
  • 수정 2025-02-28 11:5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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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우리가 살아오고 살아갈 아름다운 말과 헌법의 풍경
  • - 탄핵심판 11차 헌법재판소 국회 측 최종변론

KTV 캡처

저절로 눈물이 두 뺨을 적시며 흐르거나 숨이 멎은 듯 호흡이 목젖을 뜨겁게 치미는 재판장의 변론을 영화에서 보았다. 그때마다 저러한 재판장과 변론은 현실에서 만날 수 없는 풍경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2·3 비상계엄 뒤 83일째 혼돈의 시절을 겪고 있는 때 대한민국 헌법재판소에서 우리말이 아름다운 풍경이 되는 감동적인 변론을 만났다. 

···

생생한 2024년 12월 3일 밤에서 2025년 2월 25일 밤에 이르는 동안 대한민국의 오장육부 속으로 강추위가 몰아쳤다. 대한민국은 국민처럼 사시나무 떨리듯 불안했고 쓰러질 듯 많은 밤 신음했다. 날씨도 예년보다 바람이 심하게 불었고 슬픔이 응고된 듯 눈송이는 푹푹 내렸다.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함성만큼 불면증의 쓰라림이 전국을 고스란히 강타하며 별들도 덩달아 뜬눈으로 지새웠다. 


대뜸 알아들을 수 없는 법적 용어들이 길게 이어지는 탄핵심판은 11회차 만에 최종변론일을 맞이했다. 시작 무렵은 다른 날과 크게 다르지 않게 진행됐다. 서증자료들이 양측에서 제시된 뒤, 국회 측 변호사들이 최종변론을 하면서 익숙한 단어와 문장이 들리기 시작했다. 아니, 단어와 문장이 아니라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국회 측 9명의 변호사가 사회 전반에 존재하는 국민을 대변하듯 각기 다른 주제로 읽어내리는 변론들은 일상적 표현이었다. 쉽게 알아 들을 수 있는 상식적 메시지였다. 순간, 영화인가 현실인가 싶었고 느슨한 마음은 어느새 의자에 바른자세로 앉은 채 귀를 쫑긋 세우고 두 손을 맞대고 있었다. 염려와 걱정으로 불면의 밤을 지내야 하듯 관심을 끊을 수 없어 10차까지 들어 온 탄핵심판이 아니었던가? 11차 변론기일은 들으면 들을수록 어려운 변론이 아니었다. 줄곧 들어 온 답답하고 화가 나는 변론과 전혀 다른 향긋한 풍경의 변론이었다. 국회 측 변호인 9명의 최후변론이 이어질 때마다 어지럽던 내 몸과 마음의 자세가 오롯이 말의 풍경 속으로 제자리를 잡아갔다. 


우리가 사용하고 지켜야 할 헌법 속 국민은 단수가 아니다. 국민은 성별도, 직업도 그 어떤 차이도 인정하지 않는 남녀노소 모두를 지칭한 단어이다. 그런 맥락에서 호명된 국민을 위해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계엄과 마지막 대통령 탄핵심판이어야 한다는 변론을 들었다. 단연코, 멈춰서는 안 될 민주주의의 강물이 흘러야 한다는 변론을 들었다. 아름다운 어제가 내일도 다시 꾸려져야 한다는 변론을 들었다. 헌법수호가 우리의 미래이어야 한다는 변론을 들었다. 저마다 구사한 다른 문장들이 하나의 숲이 되는 변론을 들었다. 


9명의 최종변론 중 아래 덧붙인 장순욱 변호사의 최종변론에 거론된 노래는 바야흐로 39년이 지난 노래다. 풍경이 노래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 다시 노래가 풍경이 될 수 있음을 확실히 다짐해야 한다. 그래야 '풍경'이라는 노래처럼 새로운 풍경은 펼쳐질 것이고 얼어버린 우울한 마음에도 새싹은 돋을 것이다. 그렇게 다른 듯 같은 사람의 숲은 하나가 된 대한민국 풍경을 만들 것이다. 모두 제자리에서 웃고 있을 때 아무런 폭압을 받지 않을 때 그것이 조화로운 자연이고 대대손손 이어질 평화이고 지지 않을 사랑의 꽃밭이 될 3월이 열릴 것이다. 



2025년 2월 25일 윤석열 탄핵 심판 국회 측 장순욱 변호사의 최종변론 전문


저는 이 사건 탄핵 소추 사유와는 살짝 비껴 나서 피청구인이 오염시킨 헌법의 말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피청구인이 헌법에 대해 언급했던 말을 일별해 보면서 그가 얼마나 왜곡된 헌법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겠습니다. 


말은 같은 말을 사용하는 언어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서로 소통하는 수단이자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사용하는 말이 그 말하고자 하는 대상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엉뚱한 의미로 심지어 정반대의 의미로 쓰인다면 더 이상 소통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 누군가가 권력자라면 개인과 개인 사이의 소통 단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언어 공동체 전체가 큰 혼란을 겪게 될 것입니다. 


피청구인은 자신이 당선된 지난 대선 시기에 자주 헌법을 이야기했습니다. 이번 대선은 "반헌법적 세력과 헌법 수호 세력의 대결이라고 하면서 이 나라의 헌법을 지켜야겠다는 마음에서 대선에 나왔다"고 했습니다. 검찰총장 이력을 내세우면서 상식과 공정을 역설하기도 했습니다. 


피청구인이 강조한 헌법 수호나 상식, 공정과 같은 말들은 유권자들에게 적지 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그 결과였는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대통령 취임식에서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로 시작하는 선서를 하였습니다. 이어 민주주의 위기의 원인으로 반지성주의를 지목하면서 그 극복 수단으로 합리주의와 지성주의를 언급했습니다. 


피청구인이 "공정과 상식, 합리주의와 지성주의, 헌법 수호"라고 한 말의 의미가 국민 일반의 보편적인 인식과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피청구인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넉 달이 된 무렵입니다. 미국 순방 중 피청구인의 비속어가 논란이 됐습니다. 대통령실은 그 논란을 집중 조명한 MBC 기자에게 전용기 탑승을 배제하는 조치를 하며 "대통령의 헌법 수호 책임의 일환이다. 부득이한 조치"라 했습니다. 헌법이 보장하는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면서 헌법 수호를 내세운 것입니다. 


반헌법적인 언사는 반복됐습니다. 2022년 10월경에는 "적대적 반국가 세력과는 협치가 불가능하다"며 협치 대상인 야당을 적대적 반국가 세력으로 규정했습니다. 2023년 광복절 경축사에서는 우리 사회를 자유민주주의와 공산 전체주의로 갈라진 분열적 상태로 규정하면서 사실상 진보적 시민 사회와 야권을 싸잡아 '반국가 세력, 공산 전체주의 세력'이라고 낙인했습니다. 


정부나 대통령에 비판적인 세력을 자유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으로 보고 이들을 척결 대상으로 삼겠다는 피청구인의 인식은 갈수록 강고해졌고 언어는 더욱 강퍅해졌습니다. 민심이 등을 돌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지낸해 '4월 총선'에서 국민들은 피청구인의 독단적인 국정 운영에 대해 냉엄하게 심판하였습니다. 그럼에도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선거 결과를 부정선거의 탓으로 돌리려는 망상을 키워온 것으로 보입니다. 


급기야 "종북 반국가 세력을 척결하겠다"면서 4·19혁명 이후 45년 만에 비상계엄을 단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2월 3일 그날 대국민담화를 필두로 피청구인은 일련의 어지러운 말들을 쏟아냈습니다. 담화문에서 "야당 입법 독재가 헌정 질서를 짓밟고 있다"고 했고 "내란을 획책하는 명백한 반국가행위"라고 규정했습니다. "국회는 범죄자 집단의 소굴이 되었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붕괴시키는 괴물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패악질을 일삼은 만국의 원흉 친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했습니다. 


피청구인이 말하는 자유헌정 질서 즉,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의 핵심 요소는 복수정당제 하에서 야당으로 대표되는 정치적 반대파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피청구인은 대국민 담화에서 존중과 보호의 대상인 이들을 "척결하겠다" 했습니다. 자유민주적 헌정 질서를 파괴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대목에서 또 피청구인은 "자유민주적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강변했습니다.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대한 피청구인의 이러한 전도된 헌법 인식은 자신이 검토하였다고 실토한 포고령에도 오롯이 드러나 있습니다. 포고령에는 피청구인을 비판해 온 모든 세력이 망라되어 있고 이들을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비상계엄을 통해 자신에 대한 모든 정치적 반대파들의 입을 틀어막고 손발을 묶으려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피청구인이 내세운 것은 역시나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해서라는 것이었습니다.


존경하는 재판관님! 12·3 비상계엄은 1987년 민주화 이후 차근차근 내디뎌온 민주 공화정의 도정을 무(無)로 돌리려는 것이었습니다. 무모하지만 위험천만한 도발이었습니다. 그러나 피청구인이 역주행을 기도하면서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국민들이 온몸으로 저항의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과정에서 체득하고 어느새 DNA에까지 각인된 우리가 주권자라는 시민 의식이었습니다. 


피구인이 내팽개친 헌법 수호자로서의 책임을 국민들이 자임하고 섰던 것입니다. 비상계엄 선포 직후 권력자의 헌정 파괴를 저지하기 위해 많은 시민이 국회로 달려왔습니다. 그 모습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가 현실에서 작동하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감동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이날 우리는 살아 숨 쉬는 헌법의 실체를 온몸으로 느끼는 실로 역사적인 체험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앞으로 설령 독재를 꿈꾸는 또 다른 몽상가의 또 다른 헌법 파괴 시도가 있더라도 그로부터 민주공화국을 지켜내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탄핵 결정이 나온 후에 우리 사회가 분열과 혼란을 겪을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권자가 헌법을 지켜낸 우리의 경험은 그러한 혼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지혜를 줄 것입니다. 따라서 그 혼란의 시간은 길지 않을 것입니다. 


존경하는 재판관님! 피청구인은 자유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언동을 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말했습니다. 헌법을 파괴하는 순간에도 헌법 수호를 말했습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헌법의 말, 헌법의 풍경을 오염시킨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노래(하덕규의 풍경, 시인과촌장 2집) 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이 노랫말처럼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우리도 하루빨리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그 첫 단추가 권력자가 오염시킨 헌법의 말들을 그 말들이 가지는 원래의 숭고한 의미로 돌려놓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국민과 함께 이 사건 탄핵 결정문에서 피청구인이 오염시킨 헌법의 말과 헌법의 풍경이 제자리를 찾는 모습을 꼭 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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