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이성부 시인의 시 '봄' 전문
이 시는 시집 《 우리 앞이 모두 길이다》 에 실려있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연의 섭리대로 곧 봄은 온다. 추위가 길어지고
현실이 막막하여 기다림마저 희미해져가도 꼭 올 것이다.
겨울을 이기고 오느냐고 더디게 더디게 도착할지라도 마침내 와서 봄길을 열어줄 것이다.
그 봄이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적용되는 봄이었으면 한다. 현대철학의 거장 존 롤스가 '정의론'에서 소개한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의 봄이었으면 좋겠다.
따사로운 봄햇살처럼, 부푼 봄흙처럼, 달큰한 봄바람처럼 법의 적용이나 주어지는 기회가 차별 없기를 바란다.
기다리는 마음 풍경을 생동감있게 잘 그린 시다. 참 눈부시다.
어향숙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김유정 신인문학상'(2016)을 받았다. 시집으로 《낯선 위로가 눈물을 닦아주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