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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향숙의 시가 있는 일요일] 작설차를 마시며
  • 어향숙 시인
  • 등록 2025-03-30 00:30:57
  • 수정 2025-03-30 11:5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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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마셔도

혼자가 아니어서 좋다


흙바닥을 쪼던

딱딱한 부리 속에

부드러운 혀가 숨어 있다


귀를 기울이면

그윽한 말 중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말이 있다


원망, 그 한마디 말보다

날개를 키워왔다는 말

내 목구멍을 핥아줄 때

두 눈을 잃은

절망의 부기가 가라앉는다


식어가는 찻잔에 남은

마지막 한 방울 말까지 마시고 나면

세상 구석 미세한 소리조차 받들어 마시는

창문 밖 저 귀가 큰 겸손한 고요


덩치 큰 어둠의 입술도 달싹거린다


-손병걸 시인의 시 '작설차를 마시며' 전문



 이 시는 손병걸 시인의 시집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에 실려있다.


 '작설雀舌'은 보통 곡우(4월 20일) 전후에 딴 찻잎 새순을 말한다. 꼭 '참새의 혀'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화자는 이 작설차雀舌茶를 혼자 마셔도 혼자가 아니어서 좋다고 말한다. 흙바닥을 쪼던 부리 속 부드러운 혀들이 그윽한 말을 들려준다고 느낀다. 그 말들은 "원망"보다 "날개를 잘 키워왔다"고 위로해 준다. 찻잔에 남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정성스레 마시면서 세상 구석 미세한 소리조차 받들어 음미해 본다. 귀가 겸손해질수록 덩치 큰 어둠의 입술도 달싹거리는 것 같다.


 손병걸 시인은 나이 서른 즈음에 두 눈을 잃었고 그후 오랫동안 탄광굴에 갇힌 짐승처럼 절망으로 골방에 움츠려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새벽, 출근하는 이웃들 발소리가 마치 빛처럼 겹겹이 쌓인 어둠을 뚫고 들려왔단다. 그래서 그 희미한 빛으로 다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열 개의 손가락 끝과 다른 감각들이 눈을 대신한다. 특히 소리로 많은 것을 잘 본다. 언젠가 모인 사람들 목소리만 듣고도 키, 몸무게까지 정확하게 맞춰 놀랬던 일화가 있다.


 매월당 김시습이 쓴 '작설雀舌'이란 시에 "一啜雲腴雙眼明 운유차 한 모금 마시니 두 눈이 밝아진다"는 구절이 나온다. 아마 시인도 이런 운유처럼 깊은 작설차雀舌茶를 마시며 눈이 밝아질 것 같은 큰 위안을 받고 시적 사유도 깊어졌으리라 짐작된다. 시의 울림이 크다.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듯 절망 안에서도 희망은 어느 구석에선가 숨쉬고 있다. 그 희망이 아무리 미약하더라도 간절히 원한다면 반드시 빛을 만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베토벤이 청력을 잃고도 인류사상 최고의 곡이라고 일컫는 '교향곡 9번 합창'을 작곡한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오늘 아침에는 차를 한 잔 마시고 싶다. 뜨거운 물이 찻잎을 우려내는 시간을 기다리며  공간 가득 퍼지는 은은한 향을 음미해도 좋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어향숙 시인은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김유정 신인문학상'(2016)을 받았다. 시집으로 《낯선 위로가 눈물을 닦아주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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