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둡고 긴 죽음의 터널을 목숨 걸고 빠져나왔다. 그 터널에 갇혀있을 때는 그곳 탈출이 목표였다. 그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하지만, 막상 죽음의 터널에서 빠져나오니 내 앞에는 ‘전신마비’라는 더 큰 문제가 내 인생을 가로막고 있었다. 앞으로의 삶에 대한 생각들이 나를 괴롭고 외롭게 했다. 다시 돌아온 6인실에선 나보다 먼저 이런 상황을 겪은 환자와 보호자들이 한마디씩 하는 말에 가끔은 웃음 짓기도 했지만, 그 웃음 뒤에는 소낙비처럼 흐르고 있는 눈물이 나를 뒤흔들었다.
나는 내 현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 걸까? 너무 싫었다. 너무나도 잔인했다. 이 모든 것이 꿈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시간이 되돌아가길 상상했다. 그날 휴강을 했어도 학교에 갈걸, 엄마 친구가 안 오신다고 했을 때 엄마랑 쇼핑이라도 나갈걸, 그러면 친구 전화를 받지 않았을 텐데 아니 친구가 나오라고 했을 때 다른 약속이 있다고 할걸, 아니 친구가 차를 태워준다고 했을 때 완강히 뿌리칠걸! 모든 것을 되돌리고 싶었다. 아침에 눈을 뜨기 싫었다. 현실로 돌아가는 것이 두렵고 무서웠다. 이 상황을 피할 방법만 생각하며 죽음을 떠올렸다. 그러나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물 한 모금도 마실 수 없는 내 처지에서는 죽음 또한 선택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죽음도 사치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분노와 좌절, 반발심으로 마음이 병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내가 변해가는 것이 두려웠다.
생각과 마음이 이렇게 절망적으로 변해가는데, 부모님은 전혀 변함이 없으셨다. 사고 전이나 사고 후나 똑같이 당신들의 귀여운 막내딸이고, 휠체어를 타고 있으나 뚱보가 되었으나 똑같이 예쁘다고 하셨다. 부모님들은 내가 살아난 것만으로도 기쁘고 하나님께 의료진께 살려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만 되풀이하셨다. 그 모습을 보니 부모님이 불쌍했다. 죽을 생각만 하고 있는 그런 딸을 살려 주었다고 머리를 조아리는 부모님이 너무 가여웠다.
삶과 죽음의 갈등속에서 각오하다.
“어차피 스스로는 죽지 못할 거라면 다시 한번 더 열심히 살아 보자” 고 새로운 각오를 하게 되었다. 부정적인 마음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라고 나를 타이르며 희망을 주입하려 애썼다.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재활치료를 받기로 다짐했다. 보란 듯이 다시 일어서자는 오기가 생겨 마음이 급해졌다.
병원을 옮겨 재활치료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물리치료, 작업치료, 일어서기 등, 열심히 하면 다시 정상적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치료에 매달렸다. 여러 가지 치료를 받으면서 많은 인내와 마음의 수양이 필요했다. 작업치료실에서 블록 쌓기를 하는데 내 의지대로 블록이 잡히지도 않았고 잡아도 들어 올리는 순간 뚝 떨어졌다. 다시 아기로 돌아간 내 처지가 절망스러워서 큰 소리로 울고 싶었지만, 울지도 못했다. 내가 울면 나를 지켜보시는 부모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실까?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밥이라도 혼자서 먹을 수 있게 만들자는 목표로 마치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처럼 훈련에 매진했다.
세상은 뜻대로 되지 않나 보다. 오래 앉아 있어 엉덩이에 욕창이 생겼다. 다시 침대에 누워 욕창 치료를 하게 되었다. 전신 마비 상태에서는 과도한 훈련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9개월이란 시간이 흘러 나는 퇴원하여 집으로 가게 되었다.
집에 간다는 즐거움보다는 최중증장애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공포스러웠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김형희 /기억 속, 꿈의 여행Ⅳ / 2016년/ 72.7 x 53.0 / Acrylic on Canvas
다른 모습으로 집에 돌아오다.
나는 한참 피어오르는 꽃처럼 너무도 싱그럽고 아름답게 살아가던 23살 청춘이었다.
그날은 유난히 아름다운 하늘을 보았고, 금방 돌아올 생각에 청바지에 모자 달린 점퍼를 입고 가볍게 화장하고 총총 뛰어나갔던 내 모습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리고 9개월이란 시간이 지나 아버지가 밀어주시는 휠체어에 의지해 집으로 돌아왔다.
앞으로 두 다리가 아닌 휠체어에 의지해 살아가야 하는 현실은 이미 내 모든 청춘을 앗아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너무 잔인하게 늙어 버린 기분이다.
“형희야! 이제 여기가 네 방이야.”
부모님께서는 쓰시던 넓은 안방을 내 방으로 옮겨 놓으셨다.
내 책상, 내 옷장, 내 화장대, 예전에 내가 쓰던 물건들, 환자용 침대, 재활치료 도구, 장애인에게 필요한 보조장비, 낯선 장애인용품들, 방에 들어가는 순간 눈물이 앞을 가렸다. 달라진 내 모습, 장애인이 되어 돌아온 모습이 비참할 정도로 싫었다. 너무 슬펐다.
“아빠, 언제 또 이런 걸 만드셨어요!”
아버지는 병원에서 작업 치료하는 재활 도구들을 눈여겨보셨다가 손수 나무를 깎아 만들어 놓으셨다. 아버지는 별말씀 없으셨지만, 딸이 조금이라도 나아져 예전처럼 밝게 살아주기를 간절히 원하셨고 나도 하루빨리 현실을 인정하고 적응해서 또 다른 삶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집에 오니 병원 환경과는 많이 달라 모든 생활 방식을 새롭게 익혀야 했다. 밥 먹기, 세수하기, 양치하기 등 누구나 자연스럽게 하는 일상생활의 행동들을 나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야 했고 성공할 때마다 자신감은 조금씩 생겨났다. 다시 아이가 되어버린 내 모습과 행동을 옆에서 지켜보신 부모님의 칭찬은 힘이 되었지만, 부모님도 나도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도 병원처럼 운동 일정을 짜서 그 계획대로 실천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운동을 시작했고 부모님의 보조가 필요했기에 세 식구가 운동하며 하루를 보냈다.
침대에 누워 잠시 쉬는 동안에는 무용 동작을 만들어 움직여보려 하였지만, 마비되어버린 나의 팔과 다리는 머릿속 상상으로 멈춰있을 뿐, 생각대로 움직일 수 없는 내 처지를 보며 울고 또 울었다.
-다음 주에 이어집니다.
김형희 화가는 성균관 대학교 무용학과를 졸업했으며 CHA의과학대학교 통합의학대학원 임상미술치료 전공 석사과정을 마쳤다. 그후, 자신이 설립한 장애인예술단체 한국장애인표현예술연대 대표를 거쳐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 (재)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