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희 화가
2002년 내 생의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 전신 마비라는 너무나 크고 무거운 장애를 갖게 된 후, 나는 그림이라는 또 다른 예술세계를 만나게 되었고 장애인이 된 나를 안타까워 걱정하시는 고마운 사람들에게 화가로 행복한 그림을 그리며 제2의 인생을 열심히 살고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아니 감사로 보답하고 싶었다.
개인전을 열기까지 3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됐다. 철저한 계획과 준비, 꾸준한 인내와 창작의 열정, 체력과 싸움, 내적, 외적으로 나를 다스리고 인내하며 고비고비를 넘기며 작품 창작에 몰두했다. 그리고 전시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전시회를 개최하고 마무리하는 과정까지 많은 자원봉사자와 주위 분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렇게 준비해서 열게 된 첫 번째 개인전은 성공적이었다. 많은 분들이 찾아와 화가로서의 출발을 축하해 주었다. 과거에는 자유롭게 움직이며 춤을 췄던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교통사고로 전신 마비 장애인이 되었다. 아무것도 못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고의 전환은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했다. 이제 무대 위 몸짓의 움직임이 아닌, 캔버스 위에서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안무하며 그림 속 ‘움직임의 자유 찾기’ 로 또 다른 춤을 추고 있다.
제1회 개인전 ‘움직임의 자유 찾기’ 작가의 글 중에서
“나 또한 처음부터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누구나 그럴 수 있듯이 나에게도 어이없는 상황으로 인해 원치 않는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그림이라는 또 다른 세계를 알게 되었고 지금 내 일상에서 그림은 사랑하는 존재가 되었다. 내가 캔버스에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여성의 아름다움과 움직임을 통한 자유다. 무대 위에서 무용수들이 움직임을 통해 자유로움을 표현하듯이 나 또한 캔버스라는 무대 위에서 나만의 자유를 안무하고자 하며 어떤 의미의 부여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감정과 느낌을 전달하고자 한다.”
▲김형희 /꿈꾸는 소녀 / 2002년/ 116.8 x 91.0 / Oil on Canvas
나는 개인전이 끝나고 큰 성취감을 얻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세상에 다시 도전할 의욕과 자신감이 생기면서 또 다른 꿈을 꿀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결혼과 출산
'따르릉! 오전 9시, 따르릉! 오후 6시. 하루에 두 번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당시 군대는 오전, 오후 두 번 선착순으로 공중전화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는 매일 1등으로 전화를 걸어왔고 108통의 편지 못지않게 하루도 빠지지 않고 통화했다. 또 휴가를 나오면 가장 먼저 내가 있는 집으로 달려왔고, 짧은 휴가 때는 아예 자기 집에 가지 않고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는 더 애틋해지고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된다는 믿음과 신뢰로 사랑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제대 후 바로 복학했다. 졸업을 빨리해야 취업하고 그래야 결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 결혼해요.”
“그럼 해야지.”
“올해 안에 하자고요.”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리는 5년이라는 긴 시간 연애를 했기 때문에 당연히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고, 그의 소원인 첫사랑과의 결혼이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까 나의 장애는 너무나 높은 장벽이었다.
“내일 부모님께 말씀드릴 거예요. 당신도 부모님께 말씀드려요.”
그는 결혼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날 우리는 같은 날 각자의 부모님께 결혼을 선포하기로 했다.
“나, 성규씨랑 결혼하기로 했어요.”
내 결혼 선언에 부모님은 깜짝 놀라셨다. 어머니는 안 된다고 먼저 의사 표명을 하셨고, 아버지도 반대하셨다. 오빠들은 신중히 생각해 볼 문제라며 한발 물러섰다. 우리 집에서는 심하게 반대하지 않으실 줄 알았는데 예상 밖으로 강경했다. 어머니는 자기 몸 하나 건사하지도 못하는데 결혼 생활을 어떻게 하려고 하며, 며느리 노릇을 어떻게 하겠냐고 걱정하셨다.
그는 부모님께 "장애인 김형희가 아닌, 여자 김형희를 사랑해서 결혼하려고 하는 것이고,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장애로 단지 불편할 뿐이다."라고 부모님을 설득했지만, 장애가 있는 며느리를 누가 환영하면서 결혼을 허락하겠는가? 특히, 그는 장남에 외아들로 집안을 책임지고 이끌어 갈 책무가 있었다. 시아버지께서는 아이는 낳을 수 있는지 진단서를 끊어 오라고까지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 말에 그는 화가 나서 그 길로 집을 나와 내 작업실에서 지내게 되었다.
3개월이 흘러 시댁에서는 나를 데리고 집으로 함께 오라고 하셨다며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고, 시댁 부모님들은 나를 살갑게 맞아 주셨다. 이미 마음속에서는 결혼을 승낙하신 듯하셨다. 여성 장애인들이 모두 겪는 결혼 이야기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막장 드라마는 아니다. 시부모님께서도 장애를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셨을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2003년 5월 10일 양가 부모님의 축복 속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임신 8주가 되었네요.” 2005년 12월 31일, 나는 자연임신이 되었다.
사실, 우리 부부는 나의 장애로 임신과 출산, 양육 등으로 닥칠 문제들로 임신을 계획하지 않았지만, 하늘의 뜻인지 나는 임신이 되었다. 보통 의사들은 임신 소식을 알리며 축하한다는 인사를 하지만, 담당 의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아무래도 종합병원에서 다양한 체크를 하면서 관리하는 것이 안전할 것 같아요. 제가 소견서를 써 드릴게요.” 라고 말했다.
의사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최중증전신마비 장애인이라 마음대로 움직 일 수도 없고, 항생제 부작용 경험으로 약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위험요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안전한 관리가 필요했다. 이렇게 나는 임신의 기쁨보다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눈물이 먼저 나왔고, 주변에서도 축하보다는 근심과 걱정을 더 많이 했다.
나의 장애 때문에 새 생명 아기는 환영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고 슬퍼 우울하게 임신 기간을 보내며 어떻게 해야 하나 갈등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연히 TV를 보는데 아이를 갖고 싶어도 임신이 되지 않아서 힘들어하는 불임 부부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생명을 주신 것은 큰 선물이며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 옆에서 기뻐하는 남편을 보면서 앞으로 많이 힘들어지겠지만, 함께 최선을 다해 보기로 약속했다.
저녁마다 남편은 부어 있는 내 발을 마사지해 주었다. 어느날 하루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야, 우리 아기 태명을 ‘용’으로 하자.”
“치, 내가 용이 누군지 모를 줄 알아? 당신이 요즘 빠져 있는 무협 소설 주인공이지?.”
남편은 무협 소설 주인공 이름으로 태명을 짓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짜증을 냈지만, 남편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끝마다 ‘용아, 우리 용아.’ 하며 뱃속 아기에게 말을 걸었다.
“용은 어떤 사람이야?” 내가 물었다.
“용은 ‘영웅문’에 나오는 아주 멋진 여자 주인공인데 못 하는 것이 없는 팔방미인이야.”
“아직 딸인지 아들인지도 모르는데?”
“나는 딸이었으면 좋겠다. 자기 외롭지 않고 평생 친구가 될 수 있잖아.”
우리 부부는 늘 티격태격하지만 남편은 마음 깊이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김형희 /사랑과 행복 / 2010년/ 53.0 x 40.9(변형) / 종이, 먹
-다음 주에 이어집니다.
김형희 화가는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를 졸업한 뒤 CHA의과학대학교 통합의학대학원 임상미술치료 전공 석사과정을 마쳤다. 그 후 장애예술 단체 한국장애인표현예술연대를 설립하여 대표를 역임한 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 (재)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