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희 화가
장애인 화가들은 대부분 장애를 갖게 된 후 그림을 시작하게 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체계적으로 미술교육을 접하기가 매우 어렵고, 대부분 미술학원에서 배우고자 하지만 엘리베이터가 없는 소형건물 3층이나 4층에 자리 잡고 있어 계단으로 이동해야 한다. 그래서 개인 지도도 생각해 보지만 수업료 부담이 커서 교육받을 엄두조차 낼 수 없는 현실이다.
최근에는 문화센터에서 저렴하게 배울 수도 있고, 장애인단체나 공공기관에서 진행하는 아카데미 교육을 통해서 배울 기회도 많아졌다. 장애인 본인이 미술교육 받기를 원한다면 다양한 곳에서 받을 수 있는 기회는 많아졌지만, 아직도 체계적인 학교 전문예술교육을 받을 수 없는 현실은 늘 열등감을 갖게 한다.
‘장애인이 그린 그림이야!.’라는 소리를 들었다. 신체적 결핍은 입으로, 발로, 손목에 붓을 묶어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를 해소한다. 그것이 그림을 관람하는데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상적으로 그리지 못해서 그림의 수준이 떨어진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힘들게 그렸기 때문에 동정과 감동을 해야 한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장애인 화가도 작가이며 예술을 하는 예술인이다. 단지 육체적으로 불편할 뿐, 그림 자체로만 냉정하게 평가받아야 한다. 또한, 장애 예술가들도 ‘장애 때문에 이 정도밖에 할 수 없어!’라는 자기 합리화보다 예술에 있어 장애가 창작의 원천이 되어 나만의 특별함으로 진정성 있는 예술가로 질적 성장을 해야 한다.
아직도 전문예술교육을 받기 어려운 환경이지만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라도 어느 정도 기본적인 사물을 묘사할 수 있으면, ‘마음과 머리’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어떻게, 어떤 방법과 재료를 활용하여, 어떤 의미와 메시지를 표현할까’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내 안에 갇혀 있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시대의 흐름과 새로움을 이해하고 모든 예술을 열린 생각으로 받아들이며, 내 안의 진정한 ‘나’를 찾아 표현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예술 활동을 하는 데 장애로 불편함은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고 그런 문제를 해결하고 그림을 그린다면 ‘장애인 화가’라고 굳이 불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장애’는 예술의 새로운 오브제이자 ‘다름’을 이해할 수 있는 독특함이다‘
▲김형희 /기억 속 꿈의 여행Ⅱ / 2016년/ 90.9 x 60.6 / Acrylic on Canvas
운명적 사랑을 만나다.
오랫동안 혼자서 그림을 그리다 우연히 공공기관에서 주최하는 장애인미술 공모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작품을 출품하게 되었고 입상을 했다. 큰 상은 아니었지만 내 작품을 평가받고 입상작 전시회도 열고, 부상으로 제주도로 스케치 여행까지 갈 수 있게 되었다. 장애인이 된 후 처음으로 떠나는 여행이고 게다가 비행기까지 타야 한다니 많이 망설였다. 자원봉사로 만난 언니가 함께 가 주겠다고 선뜻 말해 주어 새로운 경험에 도전해 보고자 처음으로 부모님의 도움 없이 물 건너 제주도를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원봉사자로 온 한 남학생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는 사회복지학과에 다니는 학생이었고 말이 없고 듬직해 보였다. 그 당시 그는 감기몸살로 몸이 많이 아파서 자원봉사를 취소할까 하다가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아픈 몸을 이끌고 2박 3일 동안의 제주도에서 펼쳐지는 장애인 화가 스케치 여행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고 있었다.
그 당시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비행기, 관광버스 등으로 이동할 때 자원봉사자들이 모두 안거나 업어서 좌석으로 이동해야 했다. 특히 나는 키가 크고 전신 마비라 몸이 늘어져 있어 체격이 좋은 사람이 아니면 이동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주최 측 담당 선생님은
“성규씨는 2박 3일 동안 김형희 작가 전담해요. 다른 봉사자들은 감당이 안 될 거 같아.허 허.” “네!”
나는 ‘뭐야 공개적으로 창피하게.’라고 생각했고 아무튼, 담당자는 그렇게 그 남학생과 나를 묶어 주었다. 나도 동행 내내 덩치가 큰 그가 도와준다니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제주도 이곳저곳을 구경할 때마다 관광버스로 이동했는데, 그때는 리프트 장치가 장착된 장애인 전용버스가 없었던 때라 하루에 8~10번 이상 봉사자들이 안아서 올리고 내려야 했다. 아무리 힘이 있어도 힘든 일이라 나는 매우 미안했다.
“성규씨가 올해는 재수가 없었네! 나처럼 제일 무거운 사람을 전담하게 돼서.”
내 말에 그가 대답할 사이도 없이 그의 후배가 한마디 했다.
“무슨.. 올해 운이 좋은 거지. 누나 같은 미인을 대놓고 안고 다니는데 얼마나 좋아.”
그 말에 무표정하던 그가 비시시 웃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밤, 참가자들은 모여서 연락처를 주고받으며 이별의 아쉬움을 나누고 있었다. 그와 함께 자원봉사에 참여한 후배가 말했다.
“누나, 서울 가면 탕수육 사 주세요?”
“당근이지. 연락이나 꼭 하셔.”
“그럼, 전화번호 가르쳐 주세요.”
1998년 그 당시는 핸드폰이 없어서 집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우리 집은 안양이라 지역번호까지 있어 꽤 길었다.
이렇게 전화번호를 가르쳐 줘도 연락이 오지 않는 경우가 많기에 나는 기대하지 않았다.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은 학기가 시작되면 학교다니느랴 봉사하면서 만난 사람들은 까맣게 잊어버린다. 그런데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약속대로 탕수육을 사 주기로 하고 약속을 했는데 같이 나올 줄 알았던 후배는 보이지 않았고 나는 몇몇 지인들과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지만, 그는 제주도에서 하듯 내 전담 자원봉사자로 묵묵히 내 옆을 지키고 있었다. 내가 전화번호를 불러 줄 때 무관심하던 그가 나에게 전화를 한 것도 이상하고 후배 없이 약속한 것도 이상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 후, 그는 자연스럽게 내 전담 자원봉사자로 내 외출에 동행했다. 내가 부탁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가 자청한 것도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그와의 만남은 지속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의욕적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기에 나에게 주어지는 일은 뭐든지 다 하고 싶었다. 마침, 데이터베이스를 입력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는데 한글 타이핑 입력 일이 들어오게 되었다. 손가락 힘이 없는 나는 타이핑 보조도구를 끼고 독수리 타법으로 한자씩 입력해야 하는데 그 많은 양의 타이핑을 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또 한 그 작업을 부모님이 할 수도 없었고, 오빠들은 직장 생활로 정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친구들에게 단순한 작업을 부탁할 수는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해서 맡은 일을 못 하겠다고 하는 건 무책임한 행동이라 고민하고 있을 때 그가 떠올랐다. 그는 내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믿음을 언제부터인가 갖고 있었다. 그에게 부탁했다. 그는 내가 무턱대고 맡은 타이핑 입력 작업을 밤을 새워서 마무리해 주었다.
그 후 그는 조금씩 내 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가 부담스러웠다. 일시적인 감정일 뿐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랑은 결혼으로 완성되야 한다는 보수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내 몸 하나 스스로 건사할 수 없는 처지가 그 누구와도 결혼할 수 없는 여자라고 혼자서 결정을 내렸기에 사랑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다. 내가 밀어내자 그도 더 이상 다가오지 못했다. 그 당시 그는 대학교 3학년이었고 나보다 6살이나 아래인 풋내나는 청년이었다. 그도 연락이 없었다. 나도 그를 부르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 인연은 여기에서 끝나는 것 같았다.
“형희야! 전시회 올 거지?”
“같이 갈 봉사자가 없어.”
“진작 말하지. 알았어. 내가 알아볼게. 끊어 봐.”
전시를 주관하는 담당자가 단체 전시회 오픈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는지 자원봉사자를 구해 나에게 보내 주겠다며 외출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전화가 왔다. 그리고 온 자원봉사자가 바로 그였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그를 보자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어디 아팠어요? 얼굴 살 빠졌네.”
나는 머쓱해서 말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어색하게 말을 붙였다.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예전 같으면 ‘야, 네가 무슨 생각할 게 있니?’ 하면서 농담했을 텐데 이상하게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 입대해요.”
“언제?”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군대 가려고 휴학 중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입대라는 단어가 내 가슴을 허전하게 했다. 입대를 앞둔 그에게 잘해 주고 싶었다. 입대 전에 그는 나에게 고백했다. 내가 첫사랑이고 제대 후 꼭 첫사랑과 결혼하고 싶다며 그는 준비해 온 반지를 끼워주며 제대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 약간 당황도 되었지만, 그의 눈빛이 촉촉이 젖어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입대를 앞둔 그에게 심각한 얘기로 마음을 무겁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알았어. 어디 가진 않을게. 근데 군에 가서도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어떻게요?”
“음! 연애편지 100통을 보내.”
나는 농담으로 한 말인데 그는 정말 나에게 꾸준히 편지를 보냈다. 우린 편지에 일련번호를 매겼는데 그가 나에게 보낸 편지는 정확히 108통이다. 그렇게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김형희 / 연인 / 2008년/ 40.9 x 31.8 / Oil on Canvas
-다음 주에 이어집니다.
김형희 화가는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를 졸업한 뒤 CHA의과학대학교 통합의학대학원 임상미술치료 전공 석사과정을 마쳤다. 그 후 장애예술 단체 한국장애인표현예술연대를 설립하여 대표를 역임한 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 (재)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