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 아버님께서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는 안 된다고 반대하셨다. 남편은 반대를 물룹쓰고 나와 결혼했고 늘 마음 한구석에 부모님께 불효했다는 죄책감으로 살았을 남편에게 임신 소식은 만세를 외칠 만큼 좋았을 거라 생각된다.
임신 후 나는 어지럼증이 심해져 매일 침대에 누워서 지냈다. 누운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무위도식하는 것 같아 자주 우울했다. 배가 서서히 불러오고 아기는 뱃속에서 꼼지락거리며 잘 자라고 있다고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 엄마인 나는 우울감에 빠져 있다는 것이 아기에게 너무나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그래서 여성장애인 중 아기를 낳은 지인들에게 전화해 이것저것 궁금한 사항들을 물으며 정보를 얻고 인터넷을 활용하여 태교를 시작했다. 나는 움직임에 제한이 많아 비장애인들이 하는 움직이는 다양한 태교는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음악 듣기, 독서, 그림 보기, 전래동화, 유아 동요 듣기 등, 내가 할 수 있는 태교를 했고 비록 아기가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뱃속에서 엄마의 감정과 행동들을 모두 느끼며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나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적극적인 태교를 위해 임산부 카페에도 가입하여 다양한 정보 교류를 하면서 엄마가 되는 연습도 했다. 특히 임신 기간 내내 잘 먹지 못해 아기가 잘 자라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 음식 태교를 시작했다. 태아가 자라는 개월 수에 따라 필요한 영양소의 음식들을 찾아 먹었고, 인스턴트 식품, 페스트푸드, 맵고, 짜고, 신맛이 나는 자극적인 음식은 먹지 않았다. 어지럼증 때문에 철분제를 복용하여 생긴 변비는 직접 만든 요거트에 청국장 가루를 타서 매일 먹어 해결했다.
그리고 임신 초기에는 2~3시간 간격으로 속이 쓰려 고구마나 감자를 삶아 두었다가 조금씩 먹으니까 속 쓰림 뿐만 아니라 입덧도 잠잠해졌다. 비타민 섭취를 위해 과일은 다양하게 매일 먹어 주었고, 단백질 섭취를 위해 국산 콩을 삶아 두유로 만들어 먹었고, 칼슘 섭취를 위해 우유는 하루에 3~4잔 정도를 마셨다.
또 심신의 안정을 위해 좋은 생각과 예쁜 것들을 보면서 매일 하나님께 기도했다. 사실 나는 내 장애 때문에 아이에게도 장애가 생기지나 않을까, 10개월이라는 임신 기간을 잘 견딜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많이 불안했다.
서울대학병원 산부인과 고위험 임산부실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정기검진과 함께 아기 상태 확인을 위해 실시하는 다양한 검사들도 챙겨 받았고 모든 검사 결과가 정상으로 나오니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특히 주치의 선생님께서는 최중증장애인 산모인 나를 더 많이 걱정하셨다. 경수 마비로 폐활량이 적어 배가 많이 불러오면 숨이 많이 차니 임신 초기부터 폐활량 훈련을 하라고 하셔서 나는 열심히 호흡 연습을 했다. 검사 때마다 장애인 접근성이 부족해 불편함이 많았지만 의료진의 자상한 상담과 친절한 배려로 두려움과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김형희 /Secret Garden3 / 2012년/ 116.8 x 91.0 / Acrylic on Canvas
임신 기간 내내 나는 외출 한번 하지 않고 아이만을 위해 착실하게 태교에 집중하며 시간을 보냈다. 임신 32주가 되어 양수 검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전까지는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양수가 줄고 아기의 몸무게도 잘 늘지 않는다며 양수가 계속 줄면 아이에게 이상이 생길 수 있으니 바로 입원해서 지켜보자고 하셨다. 양수과소증이나 양수비대증이 심할 경우는 아이에게 장애가 올 수도 있다고 하여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2006년 7월 4일 입원을 했다.
입원 후 매일 분만실에서 초음파 검사로 양수량을 체크 했고, 태동 검사로 아이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다행히 입원기간 동안 양수량은 줄지도 늘지도 않고 그대로 있었고, 아이의 체중은 조금씩 늘고 있다고 했다. 주치의 선생님께서는 태아가 34주만 지나면 세상에 나와서도 살 수 있을 정도로 모든 기능이 성숙해진다고 하시며 수술을 결정하셨다. 특히 나는 항생제 부작용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더 세심한 검사가 필요했다. 그렇게 2주간(임신 33, 34주)을 아이를 위한 검사와 수술 준비를 위한 검사들을 하면서 보냈다.
2006년 7월 20일 오전 8시 30분, 임신 34주 6일째 수술실로 향했다. 나는 그동안 사고로 수술을 여러 번 경험했지만 내 아기를 탄생시키는 수술이라 그런지 밤새 긴장과 떨림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어 계속 기도했다.
‘하나님! 제발 내 아이가 아무 이상 없이 건강하게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세요!.’ 이렇게 걱정하다가도 ‘아니, 전신 마비인 내가 새 생명을 탄생시킨다니 이게 정말 현실인가?’ 첫 만남에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 줄까? 아가야 고맙다. 아가야 미안하다. 아가야 사랑한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엄마의 장애가 짐이 될지 모를 아기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다. 그렇게 많은 생각으로 머릿속이 맴도는 사이 내 침대가 분만실 앞에 도착했다.
2006년 7월 20일 9시 15분 너무도 무더운 그 여름 초복 날!
예정일보다 36일 일찍 내 아기를 만났다. 아주 야무진 울음소리가 들리자 내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1.84kg. 저체중에 미숙아로 태어나서 당연히 인큐베이터에 들어갈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동안 나를 쭉 지켜보신 주치의 선생님이 한 말씀 해주셨다.
“엄마 힘들까 봐 아이가 뱃속에서 많이 안 컸네. 효녀네! 체중은 작지만 아주 야무지게 잘 영글었네요. 신생아실로 가도 되겠어요.”
아기를 본 주치의 선생님이 웃음을 지으시며 산모, 아기 모두 건강하다고 기뻐하셨다. 하지만, 나는 나의 장애 때문에 임신 기간을 다 못 채우고 태어난 아이를 볼 때마다 안쓰러움에 눈물이 흘렀다.
아기에게 미안한 마음뿐인 것을 알기나 한 듯 우리 딸은 신생아 90%가 온다는 황달도 없었고 신생아실에서 제일 건강하고 제일 예뻐서 서울대학병원 신생아실의 얼짱, 엄지공주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아기는 나와 같이 집으로 퇴원했다.
장애 있는 엄마의 몸에서 태어난다는 이유로 근심과 걱정거리로 기쁨보다는 눈물로 임신 기간을 보내야 했지만, 아기는 뱃속에서 열심히 움직이며 ‘엄마! 힘내세요.’라고 나에게 힘을 주었던 아기가 한없이 고마웠다. 누군가 ‘부모는 아이를 선택해서 낳을 수 없지만, 아이는 부모를 선택해서 온다’ 고 했는데, 내 아기는 왜 장애가 있는 나를 선택해서 온 것일까? 장애인 엄마를 선택해 준 딸에게 한없이 미안했다.
그렇게 무더웠던 여름 한가운데서 만난 소중한 나의 아기는 9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림 한 점을 그리지 못했지만, 새 생명의 탄생은 진정한 예술이며 나에게는 최고의 명작이다.
김형희 /소녀의 꿈 / 2008년/ 116.8 x 91.0 / Acrylic on Canvas
-다음 주에 이어집니다.
김형희 화가는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졸업하고 CHA의과학대학교 통합의학대학원 임상미술 치료 전공 석사과정을 마쳤다. 그 후 장애예술 단체 한국장애인표현예술연대를 설립하고 대표를 역임, 현재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 (재)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이사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