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고 후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머리가 터질 정도로 많은 생각들로 시간을 보냈다. 그 생각들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또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생각은 많지만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행동으로 옮길 수 없으니 그것 때문에 또 생각해야 했다. 머릿속에서 뱅뱅 도는 꼬여있는 생각들로 미칠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사람도 없었다.
생각을 멈추기 위해 책을 보게 되었다. 책 속의 한 구절이 나의 머리와 가슴을 멈추게 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메시지가 가슴에 꽂혔다. “그래! 절망하면 나는 더 망가질 거야”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우울과 분노 그리고 절망감을 뿌리치려면 육체적인 재활에 앞서 정신적으로 더 강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들의 삶도 포기한 채 24시간 내 곁에서 손과 발이 되어 주시며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적극 지지해 주시는 부모님께 죄송하고 미안했다. 그래서 다시 살아볼 용기를 냈다. 그리고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한 생각들을 하나씩 풀어나가다 보니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서서히 알게 되면서 나는 조금씩 새로운 내 삶에 희망을 갖게 되었다.
재활을 위해 그림을 시작하다.
병원에서 그림을 그리는 장애인을 알게 되었다. 그림을 함께하자는 권유를 받았지만, 사실 나는 그림에는 소질도 관심도 없었다. 초등학교 때 미술학원에서 잠깐 그려 본 경험뿐이었고, 전시회에 가서 그림을 감상하는 취미도 없어 거절했다.
“형희야, 그림을 그려보면 어떨까?” 둘째 오빠는 중도장애인들이 재활치료를 위해 스포츠 활동을 하거나 그림을 그린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나한테 권했다. 둘째 오빠 생각은 팔운동을 무작정 하는 것보다는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다 보면 팔운동도 되고 정서에도 도움이 될 거 같아 적극적으로 권했다. 또 가족들 모두 내가 빨리 뭔가에 집중해서 변화된 삶에 적응하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나도 열심히 재활운동을 해서 다시 무대 위에서 춤을 추고 싶었다. 그래서 재활운동 삼아 그림을 시작해 보기로 했다. 그림의 ‘그’ 자도 모르는 내가 혼자서 그림 공부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병원에서 만난 장애인 화실에 일주일에 두 번씩 나가게 되었고 둘째 오빠는 매달 학원비를 내주었다.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전신 마비 장애인인 나는 붓을 잡을 수 없다. 그래서 손목에 붓을 붕대로 묶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와트만지에 연필로 형태를 그리고 물감에 물을 섞고 풀어 색칠하는 연습을 했다. 그렇게 3개월 정도 했더니 ‘수채화’라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옆에서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테라핀’이라는 기름 냄새를 풍기며 정말 화가처럼 그림 그리는 모습이 너무 멋지고 부러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유화는 수채화보다 붓을 잡는 힘이 많이 필요했지만, 양감을 표현할 수 있어서 그림이 훨씬 무게감 있어 보였다. 나는 조금씩 그림에 흥미가 생겼고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 즐거워졌다.
무엇보다 그곳에서 장애인들과 교류하면서 이런 고통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에 위안을 받기도 했고, 나보다 먼저 경험한 사람들의 경험담들을 들으면서 앞으로 내가 만들어갈 삶을 설계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혼자만의 세상에서 살다가 1994년, 그림을 통해 또 다른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다.
▲김형희 /토슈즈 / 1994년/ 45.9 x 37.9 / Oil on Canvas
그렇게 3개월이 지나갈 무렵, 늘 화실에 데려다주시는 아버지께 문제가 생겼다. 화실은 2층이고 엘리베이터가 없어 휠체어를 들고 올라가야 한다. 그동안 지나가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올라가곤 했는데 그것도 한계가 있고, 또 아버지께서 무릎이 아프셔서 아쉽지만 화실 나가는 것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래서 집에 작은방 하나를 화실로 만들고 그곳에서 혼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도하는 사람 없이 혼자 하려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고, 그러다 보니 그림을 그리지 않는 날들이 많아졌다. 이러다가는 아무것도 안 되겠다 싶어 의식적으로 하루에 두세 시간은 붓을 잡아야겠다고 계획했다.
그리고 그림 그리기 전, 마치 무용수들이 춤추기 전 몸 푸는 느낌으로 음악을 틀어놓고 내 몸이 움직일 수 있는 범위에서 나름대로 스트레칭을 했다. 그리고 캔버스 앞에 앉아 ‘무엇을 그릴까?’ 머릿속으로 구상하기 시작했고 하얀 캔버스에 무언가를 완성하려고 집중했다. 그러나 미술에 대해 무지한 내가 독학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연히 책꽂이에 있는 무용 잡지를 보게 되었다. 나는 다시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상상을 하며 하얀 캔버스 위에 무용수들을 하나씩 그리기 시작했다. 캔버스에 무용수들이 완성될 땐, 마치 내가 안무를 하는 듯, 내 생각의 움직임이 화폭 위에서 자유롭게 춤을 추고 있었다. 너무 황홀했다. 오랫동안 완성된 그림을 보고 있으니 부정적인 생각들은 사라지고 우울함 대신 작은 희망이 채워졌다. 그리고 잠시나마 행복했다.
처음에는 붓을 손목에 붕대로 묶어서 그림을 그렸고 팔에 힘이 없어서 오랫동안 팔을 들고 있지 못했지만, 그림에 빠져들면서 팔이 아픈 것도 모르고 작업에 몰두하게 되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팔에는 힘이 많이 생겨 있었다.
다시 화가를 꿈꾸다.
내 작품의 관객은 늘 옆에서 도움을 주시는 나의 부모님이다. 어머니가 “우리 형희! 이제 화가네 화가! 안 그래?” “화가가 네 길이었나 보다”라는 말에 이어 "무…"라고 한 음절을 내뱉고 말을 멈추셨다. 무용이 내 길이 아니라는 말을 하려다가 멈춘 것이, 아직도 내가 무용에 대해 미련이 남아 마음 아파할까 조심하는 부모님을 보니 오히려 내가 더 죄송스러웠다.
나는 그림을 통해 육체적, 정신적으로 강해졌고 화가의 꿈도 꾸게 되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했지만 혼자서 그림 공부를 하려니 막막했다. 주변에 그림을 하는 사람이 없어서 조언을 구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인터넷을 통해 미술 사이트와 여러 동우회 등을 돌아다니면서 그곳의 글이나 그림들을 감상하며 나름대로 미술에 대한 지식을 넓혀 갔다.
그러다 우연히 한 동우회에서 조각을 전공하는 한 친구를 알게 되었다. 나는 이메일로 내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그 친구가 내 미술 공부를 돕고 싶다는 답장이 왔다. 나는 한 달에 한 번 함께 전시회를 관람하자는 제안을 했다. 가장 궁금한 것이 전시회였다. 실제로 가서 그림도 보고 전시회 분위기도 느끼고 싶었다. 그 친구는 흔쾌히 허락했고 처음부터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나 거리감 없이 나를 많이 배려해 주었다.
그는 자기 자동차로 안양까지 와서 나를 태우고는 전시회도 보고 서점에 들러 미술 서적도 추천해 주었다. 그림 이야기, 미술 이야기, 또 미대생들의 생활 에피소드 등, 많은 얘기를 들으며 미술 세계에 대한 간접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친구와 많은 전시회를 찾아다니면서 현대미술의 흐름과 개념, 또 재료나 기법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 친구는 졸업을 앞두고 여러 가지 일로 바빠지게 되어 더 이상 전시회를 다닐 수 없게 되었지만, 1년 동안의 전시 관람은 미술에 눈을 뜨게 되었고, 세상에 다시 나올 수 있게 용기를 준 고마운 사람이다. 그 친구 이름은 유별남이다. 당시는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했지만, 요즘은 사진작가로 유명하다. EBS TV ‘세계테마기행’에서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소개하는 방송인이기도 하고 ‘길에서 별을 만나다’ 등의 책을 낸 작가이기도 하다.
그 후, 나는 한동안 전시회 관람을 가지 못하게 되면서 또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한 지인에게 현대미술을 하시는 작가 한 분을 소개받았다. 한 달에 한 번씩 집으로 방문하셔서 그림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그분은 오실 때마다 미술 서적이나 철학책 한 권씩 추천해 주셨다. 나는 그 책들을 구입해 읽으며 미술의 역사와 미술에 대한 철학적 개념 등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김형희 / 뛰자, 날자, 그리고...상상하자 / 53.0x45.5(변형) / Oil on Canvas
-다음 주에 이어집니다.
김형희 화가는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를 졸업한 뒤 CHA의과학대학교 통합의학대학원 임상미술치료 전공 석사과정을 마쳤다. 그 후 장애예술 단체 한국장애인표현예술연대를 설립하여 대표를 역임한 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 (재)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