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천항
내가 자주 들른 우리 동네 횟집이 두 곳 있었다. 말이 횟집이지 그리 크지 않은 선술집들이었다. 만월산 아래 빌라촌에 내가 살던 집이 있었다. 빌라 현관을 내려서면 경사가 심한 골목길이 나왔다. 그 골목을 비척비척 내려오면 소방도로가 있었다. 그 길은 차들이 마주하면, 꼼짝없이 한 대가 후진해야 했다. 가뜩이나 비좁은 도로였고 빈틈없이 주차한 차들 때문이었다. 그 소방도로 양쪽으로 가게들이 도열하듯 있었다. 한때는 모 전문대학교가 만월산 밑에 있었다. 가게들은 큰 호황을 누리지는 않았으나 그런 데로 매출이 올랐다. 그러나 그 학교가 이전을 했다. 든 자리와 난 자리의 차이랄까? 당연히 가게들은 매출이 떨어졌다. 그 도로 중간쯤에 있는 '인천항'도 마찬가지였다. 떨어진 매출을 염려하듯 나는 그 횟집을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막회 한 접시와 소주 한 병 마시면, 만 원이었다.
가게 주인은 이웃이었고 나와 친한 동생이었다. 사장이라는 호칭보다는 내가 이름을 불러주기를 원한 그 친구는 한겨울에도 반소매를 입고 장사했다. 참 열이 많은 청년이었다. 눈이 쌓여 골목길을 내려가기가 버거운 날에는 눈이 불편한 나를 위해 집으로 배달도 해 주었다. 물론 배달을 하는 집이 아니었다. 배달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혼자 주방을 돌보고 혼자 테이블을 돌봐야 하는 작은 횟집이었다. 평소 말이 그리 많지 않았으나 내게는 잘 웃었다. 먼저 말도 많이 걸었다. 늦은 시각이나 영업시간이 끝날 무렵이면, 나와 술잔을 나누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은 영업시간도 한참 남았는데 내 앞에 앉더니만 소주잔을 내밀었다. 한 잔 마시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친구는 평소에 함께 소주잔을 비워도 그리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고작, 반병이나 마셨을까? 원래 술을 잘 못 마시는 체질이었다. 술이야 내가 마시면 될 일이었다. 역시, 그날도 그 친구는 부딪힌 잔을 내려놓고 다시 부딪히고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작정한 듯 쏟아놓는 이야기들이 풍성했다. 충청도 억양도 재미있었다.
횟집은 처음 하는 장사이고 결혼은 생각이 없고 연애는 좀 해봤고 운동은 축구가 좋고 새벽까지 가게를 하고 직장 생활은 다시 하기 싫고 매출은 고만고만하고 나오라는 조기축구는 못 나가고 늘 피곤하고 수족관 관리는 쉽지 않고 포 뜨는 기술은 프로가 됐고 그 외도 이렇다는 둥 저렇다는 둥 내가 묻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주저리주저리 풀어 놓다가 횟집에 대해 많이 배운 것 같아서 가게를 넓힐 것이라고 했다. 직원도 몇 쓸 것이라고 했다.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형님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시인이니까 꼭, 제대로 한 번 모시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 말을 한 지 한 달도 안 된 어느 날이었다.
그 친구가 자살했다. 믿을 수 없었다. 어제까지 웃던 친구였다. 충격이었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누가 연락을 했을까? 그 친구의 형제들이 급히 달려왔다. 아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혼자 사는 총각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그 친구 형제를 도와 승화원에서 화장했다. 특별한 장례식도 없었다. 그 친구의 유골은 형제들을 따라 고향 충청도로 향했다. 간판은 한참 동안 그냥, 걸려 있었다. 가게가 비면, 간판이 빨리 바뀌던 예전의 풍경이 아니었다. 그 친구의 자살을 모르던 동네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될 만큼 긴 시간 동안 간판은 내려오지 않았다. 어찌어찌 그 친구 형제들이 다녀간 뒤 건물주가 매물로 가게를 다시 내어놓았지만, 부동산에서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가게는 당연히 세입자를 구하지도 팔리지도 않았다. 그 친구가 자살한 곳이라는 소문만큼 가게 안에는 물건들이 어지러이 널브러져 있는 상태였다. 수족관에는 염분이 말라비틀어져 등고선이 그어져 있었고 산소를 공급하던 기계가 고무호스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한순간, 내 앞에서 사라진 그 친구는 한동안 나를 매우 혼돈 속으로 몰아갔다. 가게를 넓힌다더니 그 말은 왜 했을까? 어차피, 죽을 거라면, 계획은 왜 세운 것일까? 나를 잘 모시겠다는 말을 왜 했을까? 경찰도 다녀갔었고 가게 뒤란에서 음독한 CCTV 자료도 있었고 앰뷸런스에 실려 갔었고 약물도 검출되었다 하고 명백한 자살이 맞았다. 그러나 자살 이유는 분분했다. 동네에 떠도는 소문은 은행 빚이 많았다. 월세가 많이 밀렸다. 사채를 썼다. 협박을 받았다. 열이 많은 이유가 그 이유였다는 말들이 돌았다. 그러나 그 어떤 말도 검증된 바가 없었다. 소문의 출처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갑자기. 그 친구가 내 앞에서 죽음이라는 형식으로 사라졌고 그 어떤 방법으로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망 소식을 듣고 달려온 형제들이 그 친구가 심한 우울증을 앓은 적이 있었다고 했다. 심한 우울증이 내게 전염된 것일까? 내게 남겨준 그 친구의 마지막 선물이었을까? 삶과 죽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혼돈 속으로 몰아갔다. 초청 강연을 하러 가도 내 입과 머리가 분리되는 것 같았다. 청탁받은 원고도 편안히 쓰던 글쓰기도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지병이 생길 지경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손병걸 시인은 2005년 부산일보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은 『푸른 신호등』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통증을 켜다』 『나는 한 점의 궁극을 딛고 산다』가 있고 산문은 『열 개의 눈동자를 가진 어둠의 감시자』 『내 커피의 농도는 30도』가 있다. 『구상솟대문학상』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인국무총리상』 『민들레문학상』 『중봉조헌문학상』을 받았다.